까만 밤 하얀 밤
갑자기 주변이 깜깜해졌다. 거실 조명과 탁상 등이 꺼지고, 잘 돌아가던 선풍기와 에어컨의 전원도 픽 나갔다. “민석아, 전기 나갔나 봐. 에어컨을 너무 세게 켰나?” 차단기가 내려갔는지 보려고 두꺼비집을 열어봤다. 차단기는 잘 올라가 있는데.... 딸깍, 딸깍. 혹시 몰라 차단기를 내렸다가 다시 올려봤지만 어둠은 그대로였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깜깜해도 너무 깜깜했다. 창문을 열어 밖을 보니, 칠흑처럼 어두웠다. 집 앞 학원 간판, 길거리 가로등, 심지어 밤새 환하게 켜져 있던 맥도날드 주차장 조명까지 싹 다 나갔다.
아, 정전이구나.
동네 사람들도 나처럼 창문을 열고 스마트폰 플래시를 밝히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전기가 나간 거지? 시야에 들어오는 곳은 큰길 건너편까지 어두워 보였다. 제주 시내 한 가운데 까맣게 퍼진 어둠. 영화에 나올 법한 재난 상황이 신기해서 나와 민석은 창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놓은 채 어둠을 구경했다. 저기 청향 갈빗집도, 심지어 지에스25 간판까지 불이 다 나갔네. 갑자기 번뜩,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커먼 밤 동네를 산책할 기회가 언제 또 오겠는가. 나와 민석은 서둘러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오래된 주택과 빌라가 모여있는 제주 도심. 이곳이 이렇게 조용한 적이 있던가? 이 동네에 4살부터 살았지만, 이렇게 어두운 모습은 29년 전 그 옛날에도 본 적이 없다. 상황 파악을 위해 집에서 뛰쳐나온 이웃들이 거리 위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야, 냉장고 문 열지 마라.” 어떤 남자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신신당부한다. 전기가 언제 다시 들어올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들었나 보다. “너네 집도 전기 나간?” 여기저기 전화해서 정전의 규모를 확인하는 발 빠른 사람의 목소리도 들린다. “우리 오늘 낮에 장 안 보길 잘했다!” 나는 신나서 민석에게 말한다. 우리는 거리 위 사람들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서,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놀이터 쪽으로 향한다. 큰길에서 멀어지고 동네 깊숙이 들어갈수록 어둠은 짙어진다. 가도 가도 정전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도 많겠는데?” 우리의 궁금증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멀리서 소방차 지나가는 사이렌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조금만 걸어도 피부가 찐득거리는 열대야다. 그래도 대낮의 열기가 한 김 식고 난 후라서 어느 정도 걸을 만했다. 정전 덕분인지 밤늦게까지 동네를 누비던 배달 오토바이 소리도 오늘은 없다. 구멍가게나 식당에서 틀어놓는 노랫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적막하다. 놀이터를 둘러싼 커다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나와 남편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골목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다. 이상하게도 지금만큼은 내가 소유한, 아주아주 커다란 정원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매번 지나치는 익숙한 길인데도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히 낯설게 느껴진다. “전쟁 난 건 아니겠지?” 우리는 철도 없이 키득대며 웃는다.
그러다 문득, 한 겨울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다음날 있을 기말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새벽 늦게까지 혼자 깨어 있었다. 문제집 위로 머리를 푹 숙인 채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세상이 먹먹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하얗고 굵은 눈송이가 펑- 펑-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는 게 아닌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지, 눈송이는 하늘에서 땅까지 일직선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나는 잠옷 위에 두꺼운 패딩 하나를 툭 걸치고 부모님을 깨우지 않기 위해 까치발을 세워 살금살금 현관을 나섰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 동안 사람이 오간 적 없는 듯 바닥이 새하얬다. 나는 주차된 차 보닛 위에 쌓인 눈을 손으로 그러모아 단단하게 쥐었다.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혀를 내밀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 맛을 보고, 하얀 눈밭에 발자국도 남겼다. 소리도 냄새도 없는 백색의 시간. 아무도 나를 보지 않고, 판단하지 않았다. 그 자유로움이 좋아서 한참을 혼자 눈 쌓인 거리를 서성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추운 겨울의 새하얀 밤과 끈적한 여름의 어두운 밤. 정반대의 시간이지만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기분만은 똑같다. ‘나는 정전이 되어야만 멈추는 도시에 살고 있구나.’ 꺼지지 않는 불빛과 새어 나오는 소음이 얼마나 소란했는지, 내가 지금껏 얼마나 많은 자극을 신경 쓰며 지내고 있었는지,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야 새롭게 느낀다. 어둡고 고요한 동네를 산책하면서 느낀 자유로움이 반가워서 ‘야호~’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정말로 놀랄 것 같아 꾹 참는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집 근처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세븐일레븐 간판에 번쩍 불이 들어오더니 가로등도 하나씩 빛을 밝히기 시작했다. “다행이네, 다행이야.” 거리에 나왔던 사람들은 하나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 앞에 도착하니, 맥도날드 주차장에도 환한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주차장을 이렇게까지 밝게 비춰야 하나 싶을 정도의 조도였다. 전기가 끊긴 15분 동안, 주차 정산을 하지 못해 줄 서 있던 차들이 차례대로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집 앞 나이아가라 단란주점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세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나는 원래 자리에서 멀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