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nbi Ko

중엄에서 마지막 날

급하게 차를 몰고 중엄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할머니가 사는 집과 텃밭이 있었다. 말이 텃밭이지, 할머니는 100평이 넘는 땅에서 십여 가지 작물을 키웠다. 양파, 대파, 양배추, 상추, 마늘, 시금치. 계절에 맞춰 매번 다른 채소가 그곳에서 자랐다. 하지만 때는 바깥에 잠시 서 있기도 힘든 8월 초. 무더위 속 농한기를 지나고 있는 시골에서 할머니의 텃밭이라고 예외일 순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밭에 뭐 심어신지 보고 오라이. 전화로는 안 심었다고 하는데 거짓말인 거 달마.' 나이를 생각하라며, 이제 농사 좀 그만 지으라고 엄마는 말렸지만 할머니는 귓등으로 잔소리를 튕겨냈다.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부터는 안 하켜.' 15년 전쯤 물질 좀 그만하라고 엄마와 아빠가 할머니를 만류했을 때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엄마의 당부를 떠올리며 밭 옆에 차를 세우고 나와 발 아래를 살폈다. 놀랍게도 당장 뭐라도 심을 듯이 흙이 곱게 갈려있고 그 위에는 비닐이 덮여 있었다. 엄마 말마따나 햇볕이 뜨겁지 않은 아침저녁으로 틈틈이 밭을 가꿔 놓은 게 분명했다. 우리 할머니를 누가 말리나. 할머니의 강한 고집은 나의 자랑이자 걱정이었다. 중엄은 집마다 밭을 끼고 있어 양배추, 브로콜리, 수박 같은 밭작물이 유명했는데, 그와 동시에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해안도로가 나올 정도로 바다와 가까워서 소금기 가득한 바람에 늘 비린내가 실려 오는 동네이기도 했다. 남편을 일찍 저세상으로 보낸 할머니는 밭에서 검질 매고 바다에서 물질하며 사형제를 키웠다. 평생을 그렇게 독립적으로 살아온 사람이 잔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을 리 만무했다.

밭 옆으로 할머니가 사는 하얗고 자그마한 집이 보였다. 큰 감나무 하나를 옆에 끼고 마당으로 둘러싸인 귀여운 집이었다. (물론 그 마당도 할머니의 보조 텃밭이나 다름없었다.) 대문 옆으로 할머니가 미리 꺼내둔 짐 가방이 보였다. 당장 데리러 가겠다고 시내에서 출발하며 전화한 게 30분 전이었으니, 그 사이에 할머니가 급히 싸둔 짐일 것이다. 하지만 덜렁 가방만 내놓고 할머니는 정작 보이지 않았다. 마당으로 들어서며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할머니, 나 완. 얼른 가게. 할머니, 어딘?" 자세히 보니 마당 풀 숲 사이에 할머니가 있었다. "이것 좀 땅 가라. 여기 담앙가라." 빨갛게 익은 대추 방울토마토가 굵은 줄기 사이에 주렁주렁 달려있었고, 땀에 흠뻑 젖은 할머니가 그걸 하나씩 따서 하얀 비닐봉지에 담고 있었다. "할머니, 나 못 산다. 아프댄 전화해 놓고 이거 따고 있으면 어떵 할 거? 차에 가이서. 에어컨 틀어 놘." "도마도가 너무 익어부난. 너네 어멍 주잰."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익은 방울토마토를 골라 봉지에 담았다. 이미 많이 따놓은 탓에 내가 거들 건 별로 없었다. 가득 찬 봉투를 묶으며 허리를 세우니 할머니가 종이 봉투에 아무렇게나 담아 둔 채소 뭉텅이가 눈에 들어왔다. "마농이랑 대파랑 챙겨놓은 것도 가져오라이." 차 쪽으로 멀어지는 할머니가 나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이거 챙길 시간이 필요해서 나한테 오늘 말고 내일 오라고 했던 거구나. 만약 내가 오늘 할머니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할머니는 이 많은 채소를 가방에 담아 등에 지고 다음 날 새벽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며 시내에 있는 집까지 혼자 왔을 게 분명했다.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채소와 토마토가 담긴 봉투를 한 손에 여러 개씩 쥐고 들어 트렁크에 실었다. 집까지 가는 길엔 남편이 운전을 맡았고, 나는 뒷좌석에 올라 땀을 식히고 있는 할머니 옆에 앉았다. "할머니, 어디가 어떻게 아파?" 지금껏 그래왔듯 그저 괜찮다고만 할 줄 알았던 할머니가 마치 진료실에서 의사를 마주한 환자처럼 설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부릉부릉행 먹지도 못하곡 싸지도 못하곡. 배고팡 밥을 먹잰 해도 입에서 내려가질 않애. 사이다 한입 하고 한 숟갈 먹곡, 사이다 한입에 또 한 숟갈. 겅해도 많이 들어가질 않애." "언제부터 겅핸?" "...한 혼달 되신가." 혼날 것이 무서워 눈치 보는 아이처럼 할머니의 목소리가 입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할머니가 아픈 것 같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을 엄마에게 전해 듣고 할머니를 보러 왔던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평소라면 경로당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카드를 치고 있었을 할머니가, 그 옆 소파에 뒤돌아 누워있었다. 괜찮냐고, 아프다고 하던데 지금도 그러냐고 묻는 나에게 할머니는 한사코 손사래만 쳤다. '나는 아무 충도 안하난 너네 어멍이랑 아방이나 걱정하라. 나는 아무 충도 안하다이.' 그건 분명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나와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던 할머니가 오늘 낮에 갑자기 아빠에게 전화해서 자신을 병원에 데리고 가달라며 부탁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아픈 곳을 줄줄 읊어대고 있다.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병원엔 내일 가도 되는디. 무사 바로 완? 내일 오주." "할머니가 아프다고 하니까 걱정돼서 왔지.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병원은 내일 아침 일찍 가게." 어느새 차는 중엄 마을을 떠나 애조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느릿했던 시골의 풍경은 어느새 사라지고, 6차선 도로 위에 차들은 멈출 줄 모르고 달렸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 내 손 꽉 잡아봐." 거칠고 큰 할머니의 손에 힘이 들어왔다. 내 손을 감싸 쥔 악력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봤다. 우리가 탄 차는 할머니의 집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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