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nbi Ko

물에 잠기는 시간

신발을 벗고 가지런히 정리한다. 신발이 한 켤레뿐인 걸 보니, 오늘도 수련생은 나 혼자인 모양이다. 문 하나를 더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음악 소리가 들린다. 오묘하고 잔잔하지만 마음을 깨우는 낯선 리듬이다. 해가 반쯤 저문 저녁, 천장 등을 켜놓지 않아 실내가 어둑하다. 선생은 요가원 한구석에 반듯한 어린이 자세로 바닥에 앉아 있다. 나는 맨발로 마른 바닥을 쓸며 선생 앞에 앉는다. 그제야 선생은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뜨고 나를 본다. 오셨냐는 그의 물음에 미소로 답하면서 간단한 인사를 나눈다. 선생은 보이차가 담긴 티 포트에 전원을 켠다. 얼마 되지 않아 티가 팔팔 끓어오르면, 선생은 차판 위에 뒤집어 놓았던 잔 하나를 바로 한 후 뜨거운 보이차를 가득 따라 내 쪽으로 밀어줄 것이다. 차담을 나누는 이 시간은 수업에 앞서 늘 반복하는 의식이다.

“주말에 바다라도 다녀오셨어요? 피부가 많이 탔네요.” 특별히 놀러 다닌 적도 없는데, 원체 잘 타는 편인 내 피부는 여름마다 까무잡잡하게 변하고 만다. 심지어 올해는 바다에 한 번밖에 다녀오지 않았다. 단 한 번의 해수욕만으로 어깨와 등이 빨갛게 익어버렸고, 피부가 쓰려서 일주일 넘게 고생한 탓에 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본 바닷속 풍경은 고생할 가치가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물안경을 끼고 잠수했을 때,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내 얼굴 앞으로 지나갔다. 이름 모를 생명체들이 나 같은 침입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제 속도로 헤엄쳤다. 저 멀리 내 팔뚝만 한 물고기가 떼 지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 궁금해서 숨을 참고 또 참았지만 버티지 못하고 수면 위로 나와야 했다. 제주 바다가 이렇게 맑았던가? 그날만큼은 먼 과거의 바다로 시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은 제주에 언제 처음 오셨어요?” “처음 온 건, 벌써 30년 정도 됐어요.” 30년 전이면, 내가 제주에서 태어난 것과 비슷한 시기다. 하지만 우리의 나이 차가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자세는 너무나도 곧다. 선생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항상 아래쪽으로 느슨하게 묶는다. 온화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그에게는 어쩐지 선생이라는 호칭보다 스승이 더 잘 어울린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선생은 바다 잠수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손에 잡힐만한 곳에 소라나 전복이 많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포구에서 수영하던 어느 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커다란 전복이 선생의 시야에 들어왔다. 숨을 조금 더 참고 내려가면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물속으로 가라앉혀도 가까워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조금만, 더, 더 깊이. 결국 선생은 커다란 전복을 손에 쥐고 물 밖으로 나왔지만 그로부터 한 달 동안 잠수병 때문에 극심한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서서히 다가가지 않으면, 바다는 뭍으로 나온 사람조차도 쉽게 집어삼킨다.

선생은 티 포트를 들어 자신의 찻잔에 보이차를 붓고는 나에게 한 잔 더 마시겠냐고 묻는다. 그에게 찻잔을 내밀면서 나는 호스피스의 한 병실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나는 할머니와 함께 TV를 보고 있다. 정신을 잃을 듯이 열흘 넘게 구토만 하다가, 병원을 옮기고 나서야 자신에게 잘 맞는 진통제를 찾은 할머니가 편안함을 되찾은 후였다. 마침 화면에서 해녀에 관한 방송이 나왔다. 잠수할 때 입는 잠복부터 물질하는 동안 바다에 띄워놓는 테왁까지. 어렸을 적 할머니 댁 마당에 가면 빨랫줄에 걸려있던 것들과 똑같이 생긴 모습이었다. “할머니, 할머니도 저런 거 썬?” 할머니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삐쭉이며 나를 향해 살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TV를 봤다. 불 꺼진 병실에서 화면 불빛을 받은 할머니의 얼굴만이 환하게 빛났다. 그날은 할머니가 나를 손녀로 알아본 마지막 날이었다.

“할머니가 해녀였어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병원에 계시는 동안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간병했거든요. 한 번은 물질할 때 얼마나 깊게 잠수했었냐고 물어봤는데, 할머니가 천장을 가리키면서 ‘저만큼 깊이 들어갔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바닷속 깊이를 상상하면 보통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나요? 근데 할머니는 자기가 물속에 있는 것처럼 수면이 저 위에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나는 나도 모르게 요가원 천장을 바라본다. 찰랑이는 바닷물이 머리 위로 보이는 듯하다.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수다를 떨었던 그날 이후로, 가만히 천장을 보고 있으며 물에 잠긴 듯 귓속이 먹먹해진다. 다시 앞을 보니 선생 역시 나를 따라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요가원에 다닌 지 한 달도 넘었지만 나는 그의 이름, 나이, 심지어 출신조차 모른다. 그럼에도 이 순간만큼은 선생과 내가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내가 말없이 차판 위에 빈 잔을 올려두자, 선생은 곧 보이차로 다시 가득 채워준다. 우리는 말 없이 차를 홀짝이며 천천히 잔을 비운다. 침묵이 어색해질 때쯤, 정적을 깨며 선생이 말한다. “그럼, 이제 몸을 좀 움직여 볼까요?” 남은 차를 한입에 비운다. 빈 잔을 차탁에 올려둔 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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