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무게
아빠와 다투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다시는 아빠 인생에 대해 신경 쓰지 않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하지만 굳게 먹은 마음과 달리 내 두 볼 위로 연약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옆에서 운전을 하면서도 틈이 나면 팔을 뻗어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하지만 우는 어깨는 멈추지 않고 꺼이꺼이 들썩였다. 뒷좌석에는 엄마에게 주고 오려던 새우젓과 고춧가루 한 봉지가 그대로 놓여있었다. 엄마가 부탁한 물건도 가져다줄 겸, 다 같이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 하하호호 여유로운 일요일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러려고 눈 때문에 꽝꽝 언 도로를 달려 여기까지 왔는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술에 취한 아빠를 마주했고, 그때부터 내 순진한 계획은 빠르게 어그러지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부모님 댁 안방 천장에 핀 곰팡이었다. 어느 날 천장에서 물이 새기 시작하더니, 조그마했던 물 자국이 커지면서 그 주변을 따라 누렇고 파란 곰팡이가 생겼다. 곰팡이가 퍼져나가는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랐다. 엄마는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눈앞을 가득 채운 곰팡이 자국 때문에 한숨만 푹푹 나온다고 했다. 제주에 유례 없는 겨울 폭우가 며칠째 이어진 다음 날, 설상가상으로 화장실 천장 등 틈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고 급히 부모님 댁으로 달려갔을 때, 엄마와 아빠는 화장실 입구에 서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비장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빠는 결심했다는 듯 나에게 방수 업자를 알아보라고 했다. 집을 고치는 일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마음을 먹자, 공사 계획은 일사천리로 세워졌다. 엄마와 아빠는 28년째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도배는 몇 번 해봤어도 내부 공사는 처음인지라, 이번 기회에 낡고 불편한 곳들을 모두 손보기로 했다. 두 달쯤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공사 동안 부모님은 얼마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던 빈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지금 사는 집에서 차로 30분쯤 떨어진 먼 시골이라 불편하긴 해도, 아빠의 고향인 만큼 익숙한 동네이고 무엇보다 따로 숙박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일한 대안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공사 시작을 보름이나 앞두고 미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이사나 리모델링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기 때문에 치우고 골라내야 할 물건이 너무 많았다. 아픈 엄마가 혼자 짐을 싸는 게 어려울 걸 알아서, 나는 하루에 몇 시간씩 부모님 댁에 들러 이사 준비를 도왔다.
짐과 가구가 모두 빠져나간 집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안방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붙박이장을 철거하자, 위쪽 천장이 뻥 뚫려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곰팡이의 출처가 거기였다. 구멍은 농구공이 쑥 들어갈 정도로 컸고, 블랙홀처럼 안쪽이 껌껌해서 보는 사람을 멍하게 만들었다. 엉망인 집에 부모님을 내버려뒀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지만, 이내 속상함은 불타는 사명감으로 바뀌었다. 이번이 집을 고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일이 없다면, 새로 고친 집에서 엄마와 아빠는 죽을 때까지 살게 될 테니까. 물이 새지 않는 집을 넘어, 예쁜 집, 그리고 휠체어를 타는 엄마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에게 미리 준비한 수리 계획을 펼쳐 보이며 열변을 토했다. 이렇게 꼼꼼히 준비한 사람은 처음 본다며 사장님도 나를 따라 눈을 빛냈다. 우리는 봄이 되기 전에 공사를 마무리하자고 의지를 다졌다.
그렇게 나의 세 집 살림이 시작됐다. 평소에는 나와 남편이 사는 집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업무를 봤다. 그러다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의 전화를 받으면, 공사 현장으로 달려가 이것저것을 결정하고 새롭게 발견한 문제를 저렴한 가격으로 해결하기 위해 입씨름했다. 그 와중에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니 사다 달라거나, 혹은 그냥 심심하다는 등 연락의 이유는 다양했다. 하지만 엄마가 나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한 가지였다. 할머니가 살던 시골집 입구에는 높은 계단이 있어서 엄마 혼자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보호사나 아빠의 도움 없이는 외출이 어려웠고, 엄마는 집 안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가 공사 문제를 책임지는 동안 부모님이 서로 도우며 잘 지내주면 좋으련만, 아빠는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에게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술 마시느라 바빴다. 엄마 혼자 집 밖으로 나오려다 이미 여러 차례 엉덩방아를 찧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엄마의 부탁을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공사가 시작된 후 첫 일주일이 지나고, 오랜만에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려 시골집을 찾았다가 나는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미리 잡아둔 약속이었고, 심지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이었는데, 아빠는 이미 알코올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적당히 술에 취한 아빠는 평소와 달리 애교가 많아서 귀엽지만, 머리끝까지 취한 아빠는 같은 말을 1분 간격으로 반복하는 바보 멍청이가 된다. 그날 아빠는 자신이 고아라며, 이제 할머니도 돌아가셨으니 이렇게 술만 펑펑 마시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을 계속했다. 듣고 있기에 괴로웠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면서 집을 고치기 위해 온 에너지를 쓰고 있는데, 오랜만에 만난 아빠에게 듣는 말이 고작 이거라니. 어떻게 자식한테 그런 말을 하냐며, 사위 앞에서 쪽팔리지도 않냐고, 앞으로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 거라고 날 선 말을 골라 아빠에게 내던졌다. 그리고 남편의 손을 잡아끌며 현관문을 세게 닫고 그곳에서 나왔다.
그날 밤, 베를린에 사는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엄마에게 전해 듣고 걱정됐던 모양이었다. 언니는 시골집에 머무는 시간이 아빠를 슬프게 만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몇 달 전만 해도 할머니가 살고 있던 곳에 지내려다 보니,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아빠가 힘들어하는 것 같다는 뜻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내 마음이 그러지 못했다. 언니도 그런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공감에 힘입어 나는 묵혀뒀던 하소연을 풀어냈다. “대체 나는 왜 이럴까. 엄마랑 아빠한테 문제가 생기면, 일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직접 해결해 주고 싶어. 이번에 인테리어 공사도 그렇고, 할머니 돌아가실 때도 그랬어. 할머니 암이라는 거 알자마자 나 하던 일 올스탑하고 간병했잖아. 그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이 뭔 줄 알아? ‘이 상황을 아빠 혼자 감당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 이거였어. 진짜 짜증 나. 적당히 신경 쓰면서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왠지 알아? 우리가 엄마 아빠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그래.”
잠자코 듣고 있던 언니의 짧고 단호한 분석이, 부끄러울 만큼 정확해서 신음만 나왔다. 아, 내가 엄마와 아빠를 불쌍하게 여겼던 걸까? 엄마가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25년 전, 아빠의 나이는 불과 서른다섯이었다. 인생의 모든 프로젝트가 한창이던 젊은 나이였지만, 아빠는 출근하고, 아픈 엄마를 돌보고, 병원비를 계산하고, 어린 나와 언니를 키우기 위해 모든 시간을 쏟아야 했다. 늦은 밤, 두 딸이 다음 날 먹을 꽁치찌개를 끓이려고 분주하게 주방을 오가던 아빠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마트에서 사 온 꽁치 통조림에 묵은지를 넣어 끓인 찌개는 그 시절 아빠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였다. 아슬아슬하게 일상을 저글링 하던 아빠를 보며, 내가 가진 감정은 존경이 아니라 동정이었던 걸까? 내가 죽을 만큼 받고 싶지 않았던 그 동정을, 아픈 엄마와 돌보는 아빠를 보며 정작 내가 느꼈던 걸까? 언니의 말을 부정하며 내 마음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어떤 말도 동정보다 적확할 수가 없어서 속이 아렸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고 싶었던 건지, 언니가 최근 본 사주팔자 이야기를 꺼냈다. 베를린에 사는 한인들 사이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도사에게 재미 삼아 사주를 봤는데, 정곡을 찔리는 바람에 속이 상했다는 내용이었다. 베를린에 더 머무를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지 묻는 언니에게 도사는 무조건 베를린에 남아있으라고 답했다. 언니의 사주엔 ‘엄마 자리’가 너무 강해서,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엄마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본인의 삶을 살 수 없는 팔자라고 했다.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어 슬펐다는 언니의 마음을 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사주에도 엄마의 자리가, 그리고 아빠의 사주에는 배우자의 자리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서로가 있어서 다행이라며 껄껄 웃던 언니는 잘 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며칠 후, 나는 엄마에게 전하지 못했던 새우젓과 고춧가루를 챙겨 다시 시골집으로 향했다. 화는 풀렸지만 아직 사과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빠를 마주친다면 그냥 무시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아빠는 집에 없었다. 식탁에 물건을 올려놓으며, 나는 엄마에게 사과했다. 적어도 엄마에게는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엄마는 괜찮다며, 내가 그렇게 화를 내고 쌩하니 나간 뒤로 아빠가 정신을 차렸는지 술을 덜 먹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집안 공기가 차가웠다. 아무리 바깥에 눈이 쌓인 겨울이라고 한들, 난방을 뗐다면 작은 집에 훈기가 돌지 않을 리 없었다. 알고 보니 전기 보일러를 켜면 전체 차단기가 계속 내려간다고 했다. 누전 때문인 듯싶었다. “옛날부터 고장 나 있었던 것 같애. 말하면 고쳤을 건디, 할머니가 돈 들까 봐 말 안 하고 그냥 산 거 달마.” 그제야 이 냉랭한 작은 집이 껌껌한 블랙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물이 새는 수도꼭지, 한참 기다려야 나오는 온수, 끈적한 장판과 떨어진 옷장 문짝. 세월이 지나도 줄지 않는 돌봄의 무게를 등에 지고, 멍하니 이 집을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그 무게를 나눠진 사람으로서, 결국 아빠를 용서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아마도 평생 엄마와 아빠를 불쌍하게 여기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