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싸우는 까닭은
일단 참는다. 또 참는다. 속에 열불이 나도 참는다. 그때, 뜨거운 공기로 탱탱하게 부푼 내 풍선을 팡! 터트리는 한마디가 날아온다. “왜 그렇게 짜증을 내....” 내가? 내가 짜증을 냈다고? 이렇게 참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나를 보면 ‘저 여자 피부에서 김이 나네’하며 놀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막 찜통에서 꺼낸 감자처럼 뜨겁다. 물론 나로서는 참는 거지만, 그의 눈에는 짜증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찾아오기 전, 바로 지금이 가장 전투력 높을 때다.
화가 나면 내 머리는 빠르게 돌아간다. 팽팽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 중에서 나는 가장 날카로운 말을 고른다. 야, 짜증 난 게 아니고 화난 거거든? 말 똑바로 해. 지금 싸우자는 거? 그따위로 말할 거면 그냥 아무 말을 하지 마. 수많은 말들을 그대로 패스한 채, 오늘은 이 문장으로 시작하기로 한다. “짜증은 니가 먼저 냈잖아.” 나는 이어질 그의 대답을 뻔히 안다. “내가 언제?” 남편의 기억력은 나보다 한참 떨어지고, 공격당하면 당황해서 논리적으로 사고하질 못한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내 압승이 예상된다는 뜻이다. 나는 약 5분 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입맛대로 각색해 또박또박 읊는다. 그때, 남편이 땀으로 흘러내린 안경 코를 검지손가락으로 쓱- 치켜올리더니, 눈빛을 빛내며 예상 밖의 반격을 걸어온다. “아니지. 니가 먼저 핸드폰 못 찾았을 때부터 틱틱 거렸잖아.”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나? 지금껏 싸울 때마다 고은비 맞춤 데이터를 축적해 온 그였다. 우리의 모든 싸움은 그에게 특훈이었다. 그는 더 이상 7년 전에 내가 처음 만났던 말랑말랑한 남자가 아니다.
내 마음속 짜증이 먼저인지, 니 마음속 짜증이 먼저인지. 대체 누가 먼저 날을 세웠는지. 우리를 정밀 촬영한 엑스레이가 있다고 한들, 하물며 우리를 내내 지켜본 CCTV가 있다 한들 아무도 알 수 없다. 땡볕이 내리쬐는 거리 위에서, 정답 없는 다툼이 계속된다. 그 속에서 느는 건 우리의 시비 걸기 스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