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 애호가
삼 일째 비가 온다. 칼칼한 국물이 땡긴다. 지난 주말에 먹은 해물 칼국수 먹으러 또 가볼까? 바지락 대신 동죽으로 우린 국물이 맑고 시원한 집이었다. 바삭한 파전까지 같이 먹으면 딱인데, 그 식당에는 사이드 메뉴가 없었으니까 탈락. 말린 베트남 고추로 매운맛을 더한 짬뽕도 괜찮을 것 같다. 몇 입만 먹어도 입술이 퉁퉁 부을 정도로 매코옴한 빨간 국물, 옷에 튀지 않게 면을 돌돌 말아 숟가락에 올리고 양파랑 대파랑 오징어까지 얹어서 한입에 가득! 국물은 따로 떠먹어야지. 아, 상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나는 국물 없인 맨밥을 못 넘기고, 된장국에도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어야 속이 풀리고, 멸치보다는 무나 해물로 우린 시원한 국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소주 안주나 다름없는 이런 음식을, 술이라곤 한 잔도 즐기지 않으면서 질리도록 찾는다. 물론 이런 내 입맛은 소문난 주당인 아빠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릴 적, 아빠는 나와 언니가 늦게까지 깨어 있는 것을 싫어했다. 적어도 밤 10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 다그쳤다. 우리는 거실에 이부자리를 펴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빠 차가 주차장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텔레비전을 끄고 자는 척했다. 그럼 아빠는 차 키를 잘랑거리며 집으로 들어와 부엌 등을 켜고 요리를 시작했다. 서걱- 서걱-. 아마도 커다란 주방 가위로 김치를 자르는 소리였을 것이다. 아빠의 주특기는 꽁치 김치찌개였다. 그렇게 매일 밤, 병원에 누워있는 엄마를 대신해 아빠는 다음 날 우리가 먹을 찌개를 끓였다.
우리 집에서는 항상 때 지난 시간에 음식 냄새가 났고, 나는 주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아빠의 뒷모습을 염탐했다. 그러다 주방 등이 꺼지면 나는 다시 눈을 꼭 감은 채 잠에 든 시늉을 했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씻은 아빠는 매콤한 찌개 냄새가 가득 밴 이불을 덮고 우리 옆에서 늦은 잠을 청했다.
나는 학원에 다녀와서 배가 고파지면 찌개를 데워 저녁밥을 뚝딱 해치웠다. 양파나 대파도 없이 묵은김치와 통조림 꽁치가 전부인 요리였지만, 빨간 국물에 흰 쌀밥을 슥슥 비벼 먹는 재미가 있었다. 꽁치찌개는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만들기 쉬운 메뉴였을 뿐일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다 크고 나서는 아빠랑 꽁치찌개를 먹은 적이 없다.
아빠가 일찍 퇴근한 날이면 주로 밖에서 끼니를 때웠다. 아빠는 속 풀리는 국물을 파는 식당들을 기똥차게 잘 알았다. 미나리가 잔뜩 올라간 동태찌개, 푹 익은 감자와 시래기가 맛 좋은 감자탕, 배추 대신 무를 넣어 끓인 각재기국, 베지근하고 시원한 옥돔국. 국물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아빠 옆에서 나는 고기 살을 발라 먹고, 라면 사리를 추가하고, 가끔은 밥까지 볶아서 냄비에 들러붙은 밥을 싹싹 긁어 먹었다.
주말에는 이른 아침부터 해장국집을 향해 다 함께 걸었다. 제주 시내 수많은 해장국집 중에서 아빠는 늘 같은 식당만 갔는데, 간판 글씨가 희미해지고 가격표 위에 숫자가 몇 번이나 덧씌워진 노포였다. 우리는 늘 ‘내장탕 하나랑 해장국 두 개 선지 빼고’를 주문했고, 조금 있다가 아빠는 내 눈치를 보며 막걸리 한 잔을 추가로 시키곤 했다.
뚝배기 세 개가 우리 앞에 놓이면 아빠는 하얀 플라스틱 종지에 담긴 다진 마늘을 퍼서 나와 언니 해장국에 슬슬 풀어줬다. 마늘은 많이 넣을수록 맛있다고 했다. 팔팔 끓는 국물은 아무리 호호 불어도 뜨거웠다. 나는 다 먹지도 못할 밥 한 공기를 해장국에 모조리 말아서, 빈 밥그릇에 국물과 건더기를 조금씩 덜어 먹었다. 그러다가 내가 싫어하는 선지 조각이 나오면 아빠 뚝배기에 덜어줬다.
한 번은 내가 첫 국물을 입에 넣고 “크-흐” 했더니, 아빠가 질색팔색하며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내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내고 싶어서 내는 소리가 아닌데.... 얼큰하고 시원하고 칼칼한 진짜 국물만이 크-흐를 가능하게 했다. 흉내 내려야 흉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주륵주륵. 오늘은 거칠게 내리는 비를 뚫고서 해장국집에 가야 할 것 같다. 크-흐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하는 그 국물을 꼭 먹어야겠다. 어릴 적 가던 오래된 해장국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우리에겐 다시 새로운 단골집이 생겼다. 아빠는 지금 뭐 하려나. 아무래도 오늘 점심은 아빠한테 같이 먹자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