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고사리
무대에 조명이 들어온다. 무대 한 켠에 있는 소파에 앉아있는 여자. 편안한 추리닝 차림에, 유난히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여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두 손으로 꽉 쥔 커피잔.
여자 : 아침, 거실. 여자는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여자는 속이 복잡하다. 아 나 얼른 메일 써서 보내야 하는데. 메일 다 쓰면 글 쓰던 거 마저 쓰고 발행해야겠다. 근데 지금 몇시지?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7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여자는 생각한다. 일단 커피부터 마저 마시고, 고양이 화장실 치우고, 샤워해야겠다. 나 샤워 언제했더라? 어제 아침인가. 그냥 오늘은 샤워하지 말까? 아 너무 춥다. 4월인데 왜 이렇게 추워? 작년 봄엔 날씨가 어땠더라. 근데 지금 몇시지? 여자는 시계를 다시 본다. 아직 아침 7시 31분밖에 되지 않았다. 여자의 머릿 속에서 생각이 끊임 없이 이어진다.
(한참을 생각하는 여자. 계속 자세를 고쳐 앉다가) 어디가 불편한지, 여자는 소파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때, 여자는 소파 한 구석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소파 구석에서 고사리를 들어 관객석 쪽으로 들어 올린다. 여자는 고사리를 높이 들어올려 자세히 들여다 본다.) ..고사리...? 이게 왜 여기에...? 여자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진짜 고사리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여자는 고사리를 코 끝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진짜 고사리다! 여자는 생각한다. 왜 고사리가 우리집에 있지? 이렇게 굵고 실한 생고사리는 처음 봐.
그때, 여자의 머릿속에 아주 선명한 이미지 하나가 떠오른다. 생.각.이.곱.슬.곱.슬. 생각이 곱슬곱슬?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아, 여자의 미간에 진한 주름이 진다. (주름이 질만큼 심하게 고민하는 표정)
여자가 소파에서 일어난다. (소파에서 일어난다.) 소파 근처를 걸으며 고민하던 중, 여자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뜬다. 아! 어릴 때 봤던 동화책이잖아! 여자는 대여섯살 적 엄마가 읽어줬던 동화책의 제목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하다. 마치 어제 들은 이야기처럼, 동화책을 읽어주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여자는 근처 의자에 앉아 동화책을 펼친다. 그리고 엄마가 읽어주듯 동화책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한다.
여자 : 옛날 옛적에, 머리가 곱슬곱슬한 여자 아이가 살고 있었어. 아이의 이름은 '소심'. 걱정과 생각이 많아서 친구들이 모두 '소심'이라 불렀지. 소심이는 항상 생각하느라 바빴어. 밥 먹을 때도, 친구와 놀 때도, 야단맞을 때도. 머리 속에서는 항상 눈 앞에 벌어지는 일과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지. 소심이는 무서웠어. '혹시 이렇게 딴 생각만 하다가 딴 나라로 내가 사라지면 어쩌지?' 소심이는 엄마에게 달려가 고민을 털어놓았어. '엄마! 엄마! 무서워요.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그런 소심이에게 엄마는 으름장을 놓았단다. ‘생각이 많으면 머리가 곱슬곱슬해진단다. 아무도 머리가 곱슬곱슬한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 설마 못생긴 곱슬머리를 가지고 싶은 건 아니겠지?’
여자 : 여자는 자신이 마치 소심이가 된 것 마냥 무서움에 몸서리친다. (몸서리 친다.) 여자는 어렸을 적 이 대목에서 항상 겁에 질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생.각.이.곱.슬.곱.슬. 하지만 어린 여자는 못생긴 곱슬머리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을 앉았던 자리에 두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여자 : (관객을 바라보며) 소심이는 엄마의 말을 듣고 더 무서워졌어요. 그리고 그날 밤, 소심이는 무서운 꿈을 꿨어요. 생각이 마구마구 머릿속을 채우더니, 머리카락이 곱슬곱슬을 넘어 뽀글뽀글해지고 만 거예요. 잠에서 깬 소심이의 침대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어요. '엄마한테 혼나겠다.' 모든 것이 무서워진 소심이가 이불을 훽! 걷었더니, 누워있던 자리에 뭔가가 놓여있었어요.
(고사리를 허공에 들어 올리며) '고사리...? 이게 왜 여기에....?' 소심이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에 가장 굵고 실한 생고사리였어요. 소심이는 고사리를 들어 자세히 들여다 봤어요. 곱슬곱슬 말려있는 굵고 실한 생 고사리. '너도 나와 닮았구나.' 소심이는 생각 고사리를 끌어 안고 다시 잠에 들었어요.
여자는 다시 소파에 앉는다.
여자 : 여자는 동화책의 뒷 이야기가 더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아닌가?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던가? (하품을 하는 여자) 여자는 이제 모든 것이 다 상관 없다는 듯 다시 생각에 잠긴다. (잠시 침묵.) 머리 자를 때 됐는데, 미용실 예약할까? 아 지금 미용실 아직 안 열었겠구나. 저번에 미용실 언니가 말 걸어서 짜증났는데. 다른 데 알아볼까. 아, 근데 지금 몇시지? 여자는 시계를 본다. 아침 7시 40분이다. (기지개를 크게 켜면서) 여자는 하루가 길다고 생각하며 기지개를 편다. 그 때, 여자는 방 한 구석에서 고사리를 발견한다.
(고사리에 시선을 고정하고 다가가서, 한 손으로 고사리를 꺾어 들어올리는 여자.) 그리고, 또 (고사리를 꺾는다) 또 (고사리를 꺾는다) 또 (고사리를 꺾는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방 이곳저곳에 고사리가 널려있다. 여자는 어리둥절하다. 여자는, 여자는 자신이 있는 곳이 원래 살던 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여자의 방에는 이런 소파도, 의자도 없었다는 것을. 여자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헷갈린다. 그 대신, 여자의 양손에는 굵고 실한 생고사리가 한가득이다. 곱슬곱슬한 고사리의 머리가 마치 예쁜 꽃다발처럼 보인다.
(여자는 무대 중앙에서 허공을 바라본다.) 생각이 곱슬곱슬. 내 머리도 곱슬곱슬. 고사리도 곱슬곱슬. 곱슬곱슬. 곱슬곱슬.
무대 암전과 함께 극이 끝난다.
<나-이야기-무대 : 독백 연기 워크숍> 발표회에 올린 독백극 대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