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nbi Ko

엄마 덕분

저녁밥을 준비한다. 먼저 구워둔 갈치와 함께 먹을 미역 두부 된장국을 끓일 차례다. 국그릇에 자른 미역 한 움큼 불리고, 두부는 도마 위에서 깍둑썰어 옆으로 밀어 둔다. 스테인리스로 된 작은 채에 된장을 한 숟가락 크게 퍼 담는다. 팔팔 끓는 물에 채를 담가 된장을 숟가락으로 살살 누르니, 망에 난 구멍 사이로 된장의 연한 부분이 물에 풀려나온다. 국물이 점차 황토색을 띠며 구수한 냄새가 났다. ‘어렸을 때부터 된장을 물에 푸는 건 늘 내 일이었지.’ 엄마는 왼손을 쓸 수 없어서 한 손으로 채를 잡고 다른 손으로 된장을 푸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칼질이 필요한 식재료는 춘자 이모가 미리 썰어두는데, 그때 빼먹은 식재료를 다듬는 것도 내 몫이었다. 방에서 공부하다가도 부엌에서 엄마가 ‘은비야’ 하고 부르면 달려갔다. 공부도 저녁밥을 먹어야 계속할 수 있으니까.

엄마가 시키는 대로 된장을 풀고 대파를 썰다 보면 어느새 된장국이 완성되어 있었다. 엄마는 간을 보라며 내게 국자를 내밀곤 했다. 생각해 보면, 집에 언니나 아빠가 있어도 간 보기는 꼭 나에게 시켰다. ‘이대로 맛있어.’ ‘이건 조금 싱거운데?’ 내 말에 따라 엄마는 가스레인지 불을 끄거나, 소금을 더 넣었다. 나는 그 시간이 좋아서 언젠가 요리사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공부를 잘했던 나에게 학업이 아닌 요리를 선택할 기회는 도무지 오지 않았지만, 서른 넘어 제주로 돌아와 비건 샌드위치 샵을 차리게 된 것은 어쩌면 엄마가 장애인인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그럼 만약 엄마가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요리에 흥미를 느낄 일이 없었을까? 엄마가 비장애인인 상태로 마흔을 지나 쉰을 맞이했다면,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가 만들어준 저녁밥을 먹고, 공부나 계속하다가, 서울에 살며 대기업에 다녔을까? 이런 상상을 하다가 잘 우러난 된장 국물에 불린 미역을 넣는다.

‘만약 내가 안 아팠으면 너희 둘이랑 사이가 안 좋았을지도 몰라.’ 엄마가 이런 말을 했다고 언니에게 전해 들었다. 왜 그런 대화를 하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한 편으론 이해가 됐다. 어렸을 적 엄마는 호랑이 스타일이었다. 엄격하고 꼼꼼했다. 혼날 만한 잘못을 하면 매를 드는 것도 엄마였다. 집에 손님이 와서 어른들이 한눈을 판 사이 내가 문제를 일으키면, 엄마는 조용히 말하곤 했다. ‘은비야, 엄마랑 화장실 갈래?’ 화장실 가서 엉덩이 한 번 세게 맞아보겠냐는 뜻이었다. (엄마가 나쁜 역할, 아빠가 착한 역할을 맡자고 미리 정해뒀다는 건 다 크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교통사고 이후 엄마는 훨씬 허용적으로 변했다. 모든 조언과 안내를 잔소리로 여기던 사춘기 시절, 만약 호랑이 엄마와 함께 살았다면 분명 우리는 자주 부딪히고 싸웠을 것이다.

이렇듯, 살다 보면 엄마의 장애로 얻은 뜻밖의 장점들을 실감하는 때가 있다.

엄마의 장애를 두고 떠올리는 ‘만약’이란 가정은 극과 극을 향한다. 첫 번째 극단에는 후회, 슬픔, 그리움 같은 감정들이 있다. ‘만약 엄마에게 티코보다 튼튼하고 좋은 차를 사줬더라면.’ 아빠는 후회한다. ’만약 동생이 차에 타지 않았다면.’ 나는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도착하는 반대편 극단에는 ‘다행’이라는 감정이 있다. 엄마가 다치지 않았다면 사춘기 시절 가족과의 관계가 틀어졌을지도 모르니 오히려 다행이다. 사회적 약자인 엄마와 함께 성장기를 거친 덕분에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아픔의 범위가 넓어졌으니 다행이다. ‘나’를 중심에 둔 결정을 턱턱 내리며 살 수 있었던 것도 어릴 적에 죽음을 오가는 경험을 가까이서 지켜본 덕분이다. 후회, 슬픔, 그리움이 머무는 극단이 과거를 향한다면, 뜻밖의 다행을 만나는 극단은 현재지향적이다. 엄마의 장애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내가 퍽 마음에 든다.

엄마와 있다 보면 우리를 안 되게 바라보는 낯선 이의 말을 가끔 듣는다. ‘젊은 사람이 걷지도 못하고, 쯧쯧.’ 한결같은 동정 멘트다. 어렸을 땐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열 받고 불쾌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기원을 이해할수록, 그리고 그 중심에 엄마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될수록 분노의 마음이 줄어든다. 이제 나는 그들이 안타깝다. 휠체어에 탄 엄마 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세상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 어려움을 함께 지나온 가족의 결속력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으니까. 약자로 살면서 얻은 삶의 지혜를 함께 나눠 가졌으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훨씬 넓고 다채롭다. 엄마 덕분에 이런 세상에 살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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