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없던 어른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전교생 앞에 나가 상을 받았다. 상의 이름은 효녀 상. 내가 왜 이 상을 받게 된 건지 당시에도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반마다 꼭 한 명씩 골라 상을 주는 걸 보며 상을 위한 상이 필요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나는 줄곧 궁금했다. 왜 하필 효행상이었을까. 초등학교 4학년 이후에는 성적으로 반에서 내내 일등을 하거나 올백을 맞았고, 초등학교 6학년 땐 피구 대표 선수로 경기를 뛰었고, 해동검도 유단자에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적어도 내가 본 내 장점은 이만큼이나 많았다. 그런데 효행상이라니. ‘혹시 우리 엄마가 장애인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친 건 이미 졸업식이 끝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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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사고가 났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너무 어렸고, 그날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날이 될 거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자세한 기억에는 오류가 많다. 하지만 사고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 비밀을 나누듯 수군거리던 친구들의 모습만큼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는 갑자기 마법 세계에 들어선 해리포터가 된 기분이었다. 중요한 사건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나 자신이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른들에게 자세한 상황 설명을 듣지 못한 상태로 떠밀리듯 등교했기 때문에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빛, 언뜻 들려오는 뒷말을 통해 내가 놓인 상황의 심각성을 가늠했다.
하루 종일 기분이 붕- 떠서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던 그날의 분위기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문득 떠오르곤 했다. 그럼 나는 이게 만들어낸 기억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헷갈렸다. 엄마의 사고는 우리 가족에게 볼드모트의 이름처럼 ‘말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언니와 ‘그날’에 대해 처음 이야기 나눴을 때, 나는 가장 먼저 두 가지를 물었다. (1) 사고 난 게 몇 월쯤이었어? (2)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 애들이 수군거린 게 맞아? 언니는 (1)에는 모르겠다 답했고, (2)에는 맞다며 내 기억을 긍정했다.
그날 학교에 있던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수군거리는 친구들 사이에서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는 나, 대놓고 사실을 캐묻는 친구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언니. 그 주변에 있던 어른의 모습은 내 기억에 없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상황을 설명하며 힘든 상황에 있는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안내해 주는, 남의 불행을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다그치는 어른은 없었다. 시선의 폭력에 당황하는 우리에게 편히 울 곳을 제공해 준 어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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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어른들은 무엇을 했을까 상상해 본다. 큰 사고였으니 뉴스에도 나왔을 것이다. 누군가 전화를 걸면 반대편에서 받는다. 은비네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대. 그래서 중환자실에 있대. 엄마의 소식을 전해 들은 담임 선생은 수화기를 끊고 옆자리 선생에게 말한다. 차에 같이 타고 있던 아들이 죽었대. 누구 잘못이래? 어느 병원에 있대? 사람들은 남의 비극을 좋아한다. 얼굴을 아는 사람의 비극은 숨길 수 없을 만큼 좋아한다. 엄마의 사고 소식을 입으로 싣고 나르며 수군거리는 어른들을 아이들은 멀리서 유심히 관찰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에 와서 고스란히 따라했을 것이다. 수군수군. 너 그 얘기 들었어? 은비네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대. 어린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잔혹성을 탓할 수는 없다. 가십에 대한 호기심, 불쌍한 아이들에 대한 얕은 동정. 그 사이에 껴 방치된 나와 언니를 지켜주는 건 누구의 몫이었을까. 학교에서 그 역할을 자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보다 두 살이 많은 데다 외부 자극에 예민한 편이었던 언니는 어릴 때 겪은 일들을 더 생생하게, 그래서 고통스럽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합창단으로 유명했는데, 정기적으로 내부 오디션을 거쳐 열댓 명의 중창단원을 선정하곤 했다. 합창단원 중에서도 빼어나게 노래를 잘했던 언니는 어느 날 중창단 탈락 소식을 전해 듣는다. 육지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할 때 동행할 엄마가 없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다 큰 언니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언니를 꼭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언니는 그저 공정하고 세심한 어른을 원했을 뿐이다. 열 살 남짓한 아이에게 가혹한 현실을 무심하게 교육하는 선생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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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4년 넘게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그 어떤 선생과도 우리의 가정 상황이나 엄마의 장애에 관해 이야기 나눈 적 없다. 도시락을 싸야 하는 일이 생기거나, 부모님이 동행해야 하는 학교 행사가 열리거나, 심지어 매번 돌아오는 녹색어머니회 순서가 되어도 선생님은 나에게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불행을 겪거나 큰 변화를 마주한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던 탓일까? 학급에 아이들이 많아서 한 명씩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걸까? 어떤 이유 때문이든, 내가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내내 침묵해 오던 사람들이 그저 나를 ‘장애인 엄마와 함께 사는 효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나는 졸업식 직전에야 알았다. 그들에게 엄마는 불쌍한 장애인일 뿐이었고, 나는 그런 엄마를 돕는 기특한 딸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받는 돌봄은 무엇인지, 엄마와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장애인의 딸’이란 편견을 넘어서기 위해 내가 어떤 고군분투를 겪는지. 이런 건 그들의 관심 밖 문제였다.
물론 남발하는 ‘착한 어린이상’처럼 아무렇게나 이름 지어 만들어 낸 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설명 없이 친구들 사이에 내던져진 '그날'처럼, 내가 왜 대뜸 효녀가 됐는지 영문도 모른 채 나는 상을 받기 위해 단상에 올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