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nbi Ko

없는 집

땅을 샀다고 치자.
물론 현실의 내가 땅을 사려면 프리랜서로 살면서 힘들게 모아 온 적금을 중도 해지하고, 회사에 다닐 때 든 예금을 깨고, 25년 동안 부은 청약을 해지하고, 야금야금 사둔 주식까지 모두 처분하고, 심지어 나의 작고 귀여운 모닝까지 중고차로 팔아 치워도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내가 땅을 샀다고 치자. 이 땅은 아주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옆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제주 시내에서 차로 40분 안쪽 걸리는 곳에 있는 이 땅을 찾기 위해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발품을 팔았을 것이다.
나는 그 위에 작고 아담한 집을 한 채 짓는다.
나, 민석, 그리고 이제 막 170일에 접어든 딸 고요까지. 우리 세 식구는 아주 오래 이곳에서 살 것이다.

하늘에서 이 집을 내려다보면 ㄴ자 모양의 마당과 ㄱ자 모양의 흰 건물이 테트리스 조각처럼 맞물려있다. 건물은 단조로운 모양의 옥상도 지붕도 없는 직육면체이며, 1층이 전부다. 나는 지금껏 아파트에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다. 게다가 스무 살에 서울로 가기 전에는 항상 일 층에서만 살았다. 내가 딛는 바닥 아래에는 늘 사람이 아니라 땅이 있었고, 땅이 주는 단단하고 안정된 느낌을 늘 좋아했다.

나무로 만든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면 잔디가 깔린 마당이 보인다. 이 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마당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과 언니는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제주의 흔한 시골집처럼 안거리와 밖거리로 이루어진 집이었는데, 안거리에는 집주인 할머니가 살고 밖거리에서 우리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지냈다. 두 채의 집 사이에는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있었다. 나는 그 위에서 발가벗거나 기저귀만 입고 뒹굴며 놀곤 했다. 고요는 아직 잔디 위에 누워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잔디의 촉감이 얼마나 까끌까끌하면서도 푹신한지 고요는 모른다. 하지만 이사 갈 새집에서는 고요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풀 위를 자유롭게 누빌 것이다.

마당 한 편에는 벽돌을 쌓아 직접 만든 작은 화덕이 있고, 그 옆에 텃밭을 일굴 것이다. 짙은 색의 흙이 깔린 텃밭에는 루꼴라, 바질처럼 자주 먹고 싶지만 비싼 허브 채소와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품종의 토마토가 심겨있을 것이다.
한 번은 유명 브랜드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구경하러 간 적 있는데, 그곳에서 ‘알파룸’이라는 것을 처음 봤다. 책장과 모션데스크가 있고 남색과 회색 톤으로 인테리어한 건조한 느낌의 방이었다. 나는 민석에게 만약 알파룸이 필요하다면, 그건 바로 화덕과 텃밭이 아닐까 생각했다. 민석은 밤새 발효한 쿰쿰한 냄새의 반죽으로 아침에는 빵을 굽고 점심에는 고요를 위한 피자를 만들 것이다. 직접 키운 채소를 올린 음식으로 딸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낙이 될 것이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 집에는 현관이 없다. 대신 마당에서 실내로 이어지는 커다란 슬라이딩 도어가 있다.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집과 마당이 하나처럼 이어진다. 이 문은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이자 가장 큰 창문이기도 한 셈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다가구주택에서는 창문을 열면 검은색 아스팔트 도로와 맥도날드, 스마트폰에 고개를 묻은 학생들이나 담패 피는 아저씨가 보인다. 언젠가 고요를 안고 창밖을 보다가 ‘여기서 나무가 보인다면 어떨까’ 아쉬워한 적 있는데, 새집에서는 그런 답답함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집을 지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기준으로 집의 방향을 정할 테니까. 눈이 오고, 비가 오고, 해가 비치고, 안개가 끼면 날씨대로 바뀌는 풍경 덕분에 고요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넘쳐날 것이다.

집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를 하나 꼽으라면 식탁이 아닐까 싶다. 마당을 내려다보며 요리할 수 있도록 주방을 일자로 배치하고, 그 앞에 커다란 식탁을 둘 생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돈이 많이 들더라도 식탁만큼은 목수가 만든 원목 제품을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덕분에 나뭇결이 돋보이는 무거운 식탁을 갖게 될 것이다.
창문 밖 풍경을 우리는 식사하면서 가장 자주 누릴 것이다. 민석이 공들여 요리한 음식들, 이를테면 레몬과 양파를 곁들여 구운 고등어구이, 양고기와 향신료를 넣어 오래 끓인 카레, 올리브와 치즈가 한가득 들어간 샐러드를 우리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긴 수다를 벗 삼아 천천히 먹을 것이다.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어둑어둑해지면 노란 조명을 곳곳에 켤 것이다. 그러고는 빈 접시를 쌓으며 배불러서 졸리다고 푸념할 것이다.
어쩌면 식탁은 집중력이 필요할 때 내가 제일 먼저 찾는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 식탁에서 밥도 먹고 일도 하려면 언제나 식탁 위를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넓은 식탁에 세 식구가 둘러앉아 자기 작업에 집중하는 장면을 만나면 ‘이 맛에 좋은 식탁을 샀지’ 하고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주말이면 나는 더러워져도 괜찮은 옷을 찾아 입고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것이다. 집을 지을 때 남겨둔 페인트로 벗겨진 곳을 칠하고, 무성해진 잔디를 깎고, 텃밭에 비료를 주는 식이다. 목공방에서 만들어 온 선반을 직접 달거나 고장 난 수전을 교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손으로 고칠 수 있는 진짜 우리 집에 살고 싶었다. 윗집에서 물 샐 일도, 아랫집에서 시끄럽다고 올라올 일도 없는, 사방이 내 것인 진짜 우리 집. 어떤 문제가 생겨도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집을 갖게 된다면 기본적인 유지보수 정도는 직접 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가진 연장의 종류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웃에 사는 친구가 드릴이나 스패너가 필요하다고 하면 크기별로 골라서 빌려줄 수 있을 만큼 많아질 것이다.

내 눈에만 보이는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주말을 다 보내고 나면, 나는 샤워를 마치고 좀 더 단정해진 우리 집 거실 소파에 누워 그제야 여유로운 주말 저녁을 만끽할 것이다. 좋아하는 나초 과자 봉지를 품에 안고, 귀여운 우리딸, 착한 남편과 함께 소파에 널브러져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볼 것이다. 그러다 양치도 안 한 채 까무룩 잠에 들 것이다.

#essay #wri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