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없는 작별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큰삼촌이 암이래.” 삼촌은 아빠와 동갑으로, 그 당시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다. 전화를 끊자 문득, 햇볕에 그을린 삼촌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떠올랐다. 계절 상관없이 그의 팔뚝에는 반소매 선을 따라 탄 자국이 뚜렷했다. 삼촌은 제주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었다. 좋은 카메라를 차에 싣고 다니면서 멋진 풍경이 보이면 렌즈에 담았고, 직접 만든 나무 액자에 사진을 넣어 주변에 선물하곤 했다. 그는 손재주가 좋은 목수였다. 조카들에게 얇은 대나무로 딱총을 만들어주며 재능을 낭비하곤 했지만.
삼촌이 암 진단을 받은 것도 벌써 13년 전 일이다. 그 후로도 그는 10년을 더 살았고, 달리 말해 10년을 더 아팠다. 그가 암 환자라는 사실에 온 가족이 조금씩 둔감해질 무렵, 2022년 가을에 삼촌은 죽었다.
그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치료를 받는 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진단을 받고, 서울에 있는 대학 병원에 발길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에 삼촌 보러 가자. 삼촌 보는 거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대.” 부모님을 따라 나와 남편은 무거운 기분으로 삼촌의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이 키우는 강아지 미자도 함께였다. 삼촌은 미자를 참 좋아했다. 미자 역시 삼촌을 잘 따랐고, 무엇보다 그가 사는 집의 넓은 잔디 마당을 쏘다니는 걸 좋아했다. 삼촌은 몇 년 전 집을 직접 지었다. 항암 치료는 이미 진행 중이었지만, 평생 손으로 만드는 일을 해 온 그에게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나도 미자만큼이나 그 집을 참 좋아했다. 날씨가 좋으면 마당에서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였고 그 옆으로 오름들이 낮은 능선을 이뤘다. 저 멀리 느릿느릿 돌아가는 하얀 풍력 발전기들이 바람개비같이 작았다. 편백으로 마감한 실내에 들어서면 사시사철 시원한 나무 냄새가 훅 풍겼다.
외숙모가 우리를 반겼다. 삼촌과 사이가 좋지 않아 모여 있는 걸 보기 어려웠던 사촌 여동생들도 모두 집에 있었다. 외숙모의 안내를 받아 삼촌이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살이 쪄서 툭 튀어나온 자신의 배를 보며 ‘방금 수박 한 통을 다 먹은 탓’이라고 나를 놀리던, 장난기 어린 삼촌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쳐 보였다. “왜 서울 언니들 전화를 안 받았어요?” 삼촌과 연락이 되지 않아 노심초사라는 이모들의 전화를 받고 엄마 역시 걱정이 많았다. 삼촌은 느릿느릿 답했다. 말하기가 힘들어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버튼을 계속 잘못 누르고 작은 화면을 보면 머리가 아파서 휴대폰을 볼 수 없다고 했다. 삼촌은 침대 머리에 붙어 앉아 축 처져 있었다. 하지만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는 그대로였다. 소처럼 크고 맑은 눈빛도 여전히 같은 곳에 있었다.
삼촌은 말할 수 있었고, 힘들어도 원한다면 걸을 수 있었다. 움직임이 느리고 목소리는 쉬었지만, 살날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내가 상상했던 모습보다는 나아 보였다. 우리는 아픈 삼촌의 곁을 빙 둘러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병원에서 들려준 이야기를 외숙모가 전해 주긴 했지만, 맞받아치며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질문이라고 해봤자 밥은 잘 먹는지, 기침이 나는지 정도였는데, 오랜만에 만난 건강한 사람에게 물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간단한 안부일 뿐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삼촌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에서나 볼 법한 무서운 기계가 침대 옆에서 삼촌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만 빼고 본다면, 일상적인 가족 모임과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다시 현실로 끌어온 것은 삼촌이었다. “저기 옷장에 그 녹색 바람막이 가져와 봐.” 외숙모는 삼촌의 말에 따라 옷장에 걸려 있던 고급 스포츠 브랜드의 기능성 재킷을 꺼내 들었다. 빗물이 스며들지 않고 바람을 막아주는 소재에 모자가 달린 옷이었다. 축축한 아침 오름을 오르기에 딱 좋아 보였다. 삼촌이 평소에 입고 다니던 스타일과도 다르지 않았다. 녹색 바람막이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그가 나물을 캐면서 산을 오르는 모습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졌다. 삼촌은 그 옷을 남편에게 주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새로 산 옷인데 아깝다며, 주변에 이 옷을 입을 만한 남자는 남편밖에 없다고도 덧붙였다.
돌이켜보면 그는, 재킷을 남편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면서 코 앞에 다가온 죽음의 존재를 자신이 알고 있다고 모두에게 말하고 있었다. 재킷을 살 땐 몰랐던 미래를 삼촌은 이제 정확히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죽음, 아픔, 고통, 이별과 같은 모든 단어를 최선을 다해 피하고 싶었다. 그런 이야기는 대화 주제로 삼고 싶지가 않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재킷의 기능성만 칭찬했다. ‘삼촌, 고맙습니다. 주신 옷은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아껴 입을게요. 옷 말고도 지금껏 감사한 일이 참 많았습니다. 저는 삼촌을 아주 오래 추억할 거예요.’ 이렇게 말할 용기가 내게 있었다면. 마지막으로 삼촌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삼촌이 우리에게 재킷 대신 남기고 싶은 건 무엇인지 물어볼 수 있었다면. 분명 그럴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그냥 날려버렸다.
“짜장면이라도 먹고 가.” 삼촌은 우리가 더 머물기를 바라면서, 정작 자신은 먹지도 못하는 중국 음식을 주문해 달라고 외숙모에게 부탁했다. 배달 짜장면과 군만두를 먹으며 사람들은 거실에 둘러앉았고, 공간이 좁은 탓에 나와 아빠는 마당에 나가 먹었다. 저 멀리 제주의 바다가 희미하게 보였다. 회색의 흐린 하늘이 그 어느 때보다 제주다웠다. 다 먹은 그릇을 포개어 정리하고 우리는 작별을 나눴다. 하지만 ‘또 보자’고 인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