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썹 하는 날
이른 아침, 카페 입구에 들어서자 사장님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이!” 나와 민석도 “하이!” 하고 산뜻하게 답했다. 우리 사이의 인사가 “어서 오세요”와 “안녕하세요”보다 훨씬 간결해진 건 이미 꽤 오래전 일이다. 나와 민석은 제집 안방에 든 것처럼 편안한 몸짓으로 카운터 맞은편 긴 벤치 위에 털썩 짐을 내려놓았다. 카페 안쪽에도 편안하고 예쁜 좌석이 많지만, ‘단골 자리’라 불리는 이 벤치가 비어 있지 않는 한 우리가 다른 자리를 살펴보는 일은 없다.
우리들의 수다는 늘 음료를 주문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카페 사장인 명선이 우리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에 뭐 해?” 여기서 저녁이란, 아마도 카페가 영업을 끝낸 일곱 시 이후를 뜻하는 걸 테다. “오늘 저녁? 뭐 없을걸? 민석아, 우리 오늘 저녁에 뭐 없지?” “응, 아마도?” 오픈된 주방이라 명선의 바쁜 움직임이 훤하게들여다 보였다. 명선은 너무나도 능숙하게, 밀린 주문을 소화하느라 에스프레소 샷을 내리고 곱게 간 원두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서도 우리의 대화를 놓치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 정현 님이 얼굴 왁싱해준대.” “왁싱을? 갑자기?” “응. 정현 님이 장비 다 가지고 있다고, 우리 퇴근하면 여기서 해준대. 그리고 나는 눈썹 탈색도 할 거야.” ‘탈색’이라는 단어와 함께, 명선은 갑자기 분주히 움직이던 동작을 멈추고 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추더니 자기 눈썹을 슥 보여줬다. 뽀글뽀글 볶은 머리 스타일에 앞머리가 늘 눈썹을 덮고 있어서, 명선의 눈썹을 본 것이 그날이 처음인 듯싶었다. 숱 많은 눈썹이 양쪽 아래로 쭉 늘어져 귀여웠다. 탈색해서 노랗게 변할 명선의 눈썹을 상상하니 쿡쿡 웃음이 났다.
문 닫은 카페에서 왁싱과 탈색이라니. 탈색은 해볼까 조차 고민해 본 적 없었지만, 왁싱이라는 말에는 귀가 솔깃했다. 예전에 민석의 눈썹을 핀셋으로 한 올 한 올 뽑아서 정리해 준 적 있는데, 그 덕에 신수가 어찌나 멀끔해졌던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 역시 주기적으로 눈썹을 뽑아 정리하곤 했지만 귀찮아서 다듬은 지 오래된 데다, 왁싱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기에 궁금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정현이 왁싱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제주로 오기 전에 육지에서 수년간 왁싱과 반영구 문신 시술을 하는 작은 가게를 운영했다고 들었다. 평소에도 일하는 솜씨가 꼼꼼하고 손재주가 좋은 정현인지라, 왁싱 실력 역시 훌륭할 것 같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빨간 미니 쿠퍼 한 대가 카페 앞 갓길에 차를 대는 것이 보였다. 정현과 영주가 차에서 내리며, 반갑다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눈인사를 하고 카페를 향해 걸어왔다. 이 카페는 이런 곳이다. 누굴 만나기로 약속하고 온 것이 아님에도, 꼭 반가운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곳. 비슷한 경험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친구를 만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곳을 찾게 된다. 우리만의 사랑방. 제주시의 센트럴퍼크. 나는 항상 이곳에 오면 마음속에 무언가를 단단히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곤 한다.
정현은 카페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며, 인사도 생략한 채 말했다. “소신 님, 소신 님. 제가 뭘 가져왔게요.” 정현은 이내 자신이 빈 손인 걸 깨닫고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더니 다시 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자동차 트렁크에서 꺼낸 것은 미용 재료로 가득찬 꽤 커다란 박스였다. 그는 작은 체구로 끙끙대며 상자를 내부로 옮기더니 구석진 곳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정확히 말하면 내 눈썹을 향해 다가왔다. “소신님도 눈썹 왁싱 받으실래요?” 안그래도 방금 명선에게서 오늘 저녁에 열릴 왁싱 팝업에 대해 들었다고 설명했지만, 정현은 내 눈썹을 살펴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왁싱을 받고, 보일듯 말듯한 시스루 스타일로 눈썹에 스크래치를 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정현은 마치 꿀단지를 다루는 곰처럼, 약간은 거칠지만 다정한 손길로 내 얼굴을 이리저리 굴렸다. 눈썹 다음 타겟은 인중이었다. “인중 왁싱은 하기 전엔 잘 모르는데, 한 번 받고 나면 완전 애기처럼 변해요.”
내 인중과 민석의 눈썹을 번갈아 진단하느라 분주한 정현을 보며, 옆에 자리잡은 영주가 말했다. “정현이가 제 눈썹이랑 인중도 주기적으로 왁싱해 주는데, 진짜 잘해요.”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영주의 어딘가가 분명 변한 거 같은데.... 자세히 보니 영주의 눈썹이 없었다. 아니, 눈썹 털은 있는데 눈썹이 하얗게 새어 있었다. 당황하는 우리 표정을 보더니, 전날 밤 테스트 삼아 눈썹 탈색을 했는데 필요보다 오래 약을 바르고 그대로 둔 탓에 눈썹이 너무 노랗게 변했다는 설명이 되돌아왔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전날밤의 해프닝을 머쓱한 얼굴로 설명하는 영주의 표정이 웃겨서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때 커튼 뒤 주방에서 디저트를 만들던 카페의 또 다른 주인, 민지가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다들 옹기종기 모여있군’하는 즐거운 표정으로, 군데군데 흰 가루가 묻은 검은색 긴 앞치마를 입은 채였다. 민지는 늘 그렇듯 빠르게 대화의 흐름을 파악하더니 “나도 오늘 눈썹 탈색할 거야!”하고 다부지게 말했다. 설레는 표정으로 입을 앙다무는 걸 보니, 민지도 명선과 정현만큼이나 눈썹 미용을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곳에 모여있는 모두가, 심지어 민석조차도 예뻐질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오후 내내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문 닫은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노을이 질락 말락 하는, 주황색과 파란색이 적절히 섞인 시간대였다. 정현은 카페 좌석 한 곳을 스탠드 조명으로 밝게 만든 후, 왁스를 녹이는 작은 기계를 작동시키며 누가 첫 순서로 눈썹을 정리할지 물었다. 순서상 탈색하는 친구들보다 왁싱을 하는 사람들이 먼저였기에, 나와 민석이 첫 타자가 됐다. 나는 조금 긴장이 돼서 민석에게 먼저 하라고 했다.
정현은 자리에 앉은 민석의 눈썹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평소 만사가 귀찮은 듯 구는 정현에게서 보기 드문 집중력이었다. 손가락으로 눈썹의 위아래를 이리저리 가려 보면서 모양을 잡더니, 마음을 정한 듯 소독 패드를 꺼내 민석의 눈썹 주변을 싹싹 닦았다. 그러고는 아이스크림에 꽂혀있는 것처럼 생긴 납작한 막대로 녹은 왁스를 덜어 민석의 눈썹 주변에 신중하게 발랐다. “어때? 뜨거워?” “아니, 따뜻해. 하나도 안 뜨거워.” 모두가 민석의 눈썹을 바라보며, 얼마나 아플까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다. 정현은 라텍스 장갑을 낀 검지로 펴 발린 왁스를 꾹꾹 누르더니, 스티커를 뜯을 때처럼 가장자리를 살짝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촥!하고 왁스를 뜯어냈다. 입술 모양이 O자로 변한 민석이 “오!”하고 고통의 탄식을 내뱉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현은 소란스러운 웃음바다 한 가운데서도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반대편 손가락을 이용해 뜯어낸 자리를 꾹 눌러줬다. 그래야 덜 아프기 때문이었다. “정현 님 진짜 프로네, 프로야.” 하며 우리는 입을 모아 칭찬했다.
정현은 먹을 것도 먹지 않고, 심지어 그렇게 좋아하는 담배도 한 대 피우지 않고 왁싱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한 사람씩 눈썹을 정리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명선과 민지가 꺼내준 가래떡을 나눠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 모습이 꼭 옛날 드라마에서 본 방문판매 현장 같았다. 예뻐지고 싶다는 솔직함을 격의 없이 내보이며 하하호호 모여있는 아낙네들. 그리고 거기에 끼어있는 에겐남 한 명. 우리가 함께 이대로 나이 든다면, 언젠가는 서로의 새치를 염색해 주는 사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현 님, 저희 겨드랑이 왁싱도 해주시면 안 돼요?” 다음에는 카페 의자와 책상을 옆으로 밀어두고, 다 함께 바닥에 누워 만세를 한 채로 겨드랑이 왁싱을 받자며 우스갯소리를 나눴다. 모두가 농담하는 와중에도 굳은 왁스를 뜯어내는 정현의 손길은 분주했고, 고객들의 입에서는 힘없는 신음이 흘러나와 웃음을 샀다.
왁싱을 마친 나와 민석은 눈썹과 인중 주변이 울긋불긋했다. 작은 손거울을 서로 돌려 보면서,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우리는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명선과 민지는 탈색 약을 눈썹에 펴바르고 비닐랩을 얹어둔 탓에 우스꽝스러운 꼴을 하고서 “영주 님처럼 하얀 눈썹 되면 안 되는데~”라며 영주를 놀렸다. 영주는 삐진 듯 입술을 삐쭉거렸지만, 사실 자존심에 별로 타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탈색파 친구들은 약기운 때문에 눈이 싸하다며 호들갑을 떨다가 타이머 알람이 울리자마자 티슈로 약을 닦아냈다. 화장실로 가서 눈썹을 씻고 돌아온 친구들을 보며 우리는 예쁘다고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그날 우리는 모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딱 그만큼 예뻐졌다. 우리는 우리끼리만 아는 아름다움을 나눠 가진 채, 만족하는 마음으로 카페를 나서며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바깥은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