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브라자 연대기
“왁 시발 진짜, 이놈의 브라자만 없었어도....” 집에 들어서자마자 티셔츠와 브래지어를 휙휙 벗어 던지며 나도 모르게 욕을 시부렁거렸다.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왔을 뿐인데, 가장자리에 땀이 밴 브라자에서 쉰내가 진동했다. 남편은 빨래통에 옷을 던지며 열을 내는 나에게 여름엔 좀 시원한 브래지어를 사서 입으면 안 되냐고 물었지만, 나는 정색한 표정으로 답했다. “민석아, 이 세상에 시원한 브라자란 없어.” 나는 웃통을 벗은 채 에어컨을 틀고 소파에 누워서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브라자 발명한 사람 죽었으면. 이미 죽었겠지만 또 죽었으면. 브라자를 안 해도 된다면 올여름의 이례적인 폭염도 지금보다는 훨씬 견딜 만할 것이다. 무더위마다 반복되는 브라와의 전쟁이 유독 지긋지긋한 이번 여름이다.
생각해 보면 브래지어와 나는 첫 만남부터 어긋났다. 내 나이 열넷, 봄 소풍을 앞두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티셔츠 하나를 주문했다. 사복 센스를 자랑할 몇 안 되는 기회인만큼 고심 끝에 고른 제품이었다. 미키 마우스나 트위티 같은 복고풍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는 게 당시 유행이었는데, 나는 튀고 싶은 마음에 아무도 안 입을 것 같은 스펀지밥 노란색 티셔츠를 골랐다. 기다림 끝에 도착한 옷은 생각만큼 귀여웠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에게는 브라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티셔츠가 딱 달라붙는 타이트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가슴 모양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이 옷을 그냥 입으면 내가 평소에 브라를 차지 않는다는 사실이 온 천하에 까발려질 게 뻔했다. 달리 말해, 내 가슴이 브라자가 필요 없을 만큼 작고 납작하다는 게 들통난다는 뜻이었다. 2차 성징이 늦다는 게 콤플렉스였던 나는 엄마한테 부탁해서 브라를 하나 살까 고민했지만, 엄마는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결국 아빠와 속옷 쇼핑을 하러 가게 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사춘기를 지나던 십 대 소녀에게는 도저히 안 될 일이었다.
나는 혼자 내 방을 서성이며 고민하다가 결국 친구 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지 엄마는 제주시 중앙로 지하상가에서 ‘은지네짱’이라는 보세 속옷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은지에게 브라 두 개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고, 몇 시간 뒤 집 앞 사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날 저녁, 만 오천 원을 손에 들고 대로변에 서 있는 내 앞에 차 한 대가 섰다. “예쁘게 입어라~” 은지 엄마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창문을 내리고 까만 봉지를 건네며 활짝 웃었다. 나는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한 후 집까지 내달렸고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 봉지 안에는 교복에 받쳐 입기 좋은 흰색, 회색 스포츠 브라가 하나씩 들어있었다. 나는 회색 브라의 택을 휙 잡아 뜯고 곧장 입어봤다. 여전히 내 가슴은 작고 납작했지만 브라를 한 것만으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 위로 스펀지밥 티셔츠를 입으니 은근하게 브라 선이 보였다. 브라의 두께만큼 내 가슴이 커 보이는 건 내가 예상하지 못한 신세계였다.
하지만 나는 그걸로 성에 차지 않아서, 두루마리 휴지를 손에 둘둘 감았다가 꾹꾹 눌러 납작한 패드를 만들었다. 휴지 뽕이랄까. 그걸 똑같은 두께로 두 개 만들어서 양쪽 가슴과 브라 사이에 끼워 넣었다. 두 가슴의 높이가 다르지 않도록 좌우를 열심히 비교한 끝에 마음에 드는 핏을 완성했다. 그리고 대망의 소풍날. 신나게 놀고 학교로 돌아가는 단체 버스에 올랐는데,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은비야, 그 휴지는 뭐야?” 휴지가 슬금슬금 제자리를 벗어나다가 티셔츠 목구멍으로 반쯤 삐죽 튀어나온 것이다. 나는 그걸 차마 다시 옷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없어서 황급히 손으로 잡아뺐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창피해서 울었던가? 웃으며 이실직고했던가? 아니면 친구가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던가? 하지만 하루 종일 가슴과 브라 사이에 끼어있느라 따뜻해진 휴지 뽕의 뻣뻣한 촉감만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온라인 쇼핑몰 책자에서 고른 스포츠 브라를 나에게 정식으로 선물했고, 나는 엄마표 브라와 은지네짱 보세 브라를 전전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후로도 내 가슴 크기에 극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스포츠 브라를 지나 와이어 브라를 입게 됐다. 그러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했을 때 나는 또 한 번의 브라 신세계를 만나게 됐는데, 처음으로 쇼핑몰 책자나 은지네짱이 아닌 폭 넓은 선택지를 갖게 된 것이었다. 그때 내가 환장했던 건 가슴을 모아주고 올려주는 기능성 브라자였다. 한 번은 소문을 듣고 ‘원더브라’라는 브랜드 제품을 사기 위해 가로수길까지 찾아간 적 있다. 가슴이 예쁘기로 소문난 할리우드 스타 미란다 커가 모델로 활동하는 곳이었다. 듣기로는 브라를 입으면 직원 언니가 탈의실에 들어와 내 가슴 모양에 맞는 추가 패드나 제품 라인을 추천해 준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나에게 브라는 입어보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피부에 닿는 물건이라는 이유로 입어보고 살 수 있는 속옷 가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홀린 듯 매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도떼기시장처럼 좁은 매장에서 30분 만에 15만 원어치 브래지어를 골라 결제했다. 할인 중인 브라 팬티 세트 세 개를 골랐을 뿐인데 그 정도였다.
나는 브랜드 속옷이 이렇게 비싸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당시 내 한 달 생활비가 40만 원이었으니까 아마 그달의 마지막 열흘은 라면과 학식으로 연명했을 테지만 ‘브래지어는 6개월에서 1년에 한 번 교체해 주어야 좋다’는, 지금 생각하면 상술에 가까운 기준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더브라 브라는 책상 위에 올려두기만 해도 패드가 봉긋한 가슴 모양을 유지할 정도로 와이어가 탱탱했다. 브라를 입고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집에 돌아와 속옷을 벗으면, 가슴 아래 갈매기 모양으로 와이어 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원체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어서 여름엔 브라 라인을 따라 땀띠가 생기기도 했다. 답답하고 간지러웠지만, 나는 원더브라가 만들어준 내 가짜 가슴 모양을 도무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대학 졸업을 앞두게 된 즘, 난데없이 와이어 없는 브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수면 위로 떠오른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와 맞아떨어진 때였다.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사회적 분위기나 획일적인 미적 기준 앞에서 움츠러드는 여성의 심리에 대해 알게 됐지만, 초라한 내 가슴에는 적용되지 않는 페미니즘 상식이었다. 심지어 안 입은 것처럼 편안하다는 브라렛 광고도 마른 체형에 예쁜 가슴을 가진 연예인들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아니, 나도 가슴만 이쁘면 벌써 브라렛 입고도 남았지. 브라렛만 입나? 그냥 홀랑 벗고 다녔지.’ 혼자 분을 삭이며, 나는 이 모든 게 가슴이 크고 예쁜 여자들의 폭 넓은 쇼핑 리스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유니클로에서 패드가 내장된 나시티를 입어본 후 나에게 세 번째 신세계가 찾아왔다. 꽉 조이는 느낌이 전혀 없는데 얇은 패드가 가슴 모양을 유지해 줬다. 심지어 에어리즘이라니! 솔직히 페미니즘이고 뭐고, 와이어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그 실용성 하나가 내 마음을 꽉 사로잡았다.
와이어 없는 브라의 해방감을 맛본 나는, 10년의 서울 생활을 뒤로하고 제주로 온 후 일주일에 6일 정도 브라자 없이 살기 시작했다. 노브라 운동에 동참하고 싶다거나 하는 거창한 뜻이 있던 건 아니다. 그저 내 삶과 주변 환경이 바뀌면서, 나와 하루 16시간 꼭 붙어있던 브라자와의 관계 역시 자연스럽게 변했을 뿐이다. 회사를 그만뒀더니 상사나 거래처 사람들 눈치를 보며 옷 입을 필요가 없어졌다. 제주에 왔더니 번화가에서 친구들 만날 일이 사라졌다. 결혼하고 남편과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가슴은 점점 더 자유롭게 뛰놀기 시작했다. 나는 가끔 가족 행사가 있거나 업무차 만나야 할 사람이 생길 때만 가벼운 브라렛을 받쳐 입었다. 하지만 아무리 압박감이 없는 편안한 제품이라 해도, 몇 주간 노브라로 살다가 오랜만에 브라자를 입으면 소화가 안 될 정도로 속이 답답해졌다. 나는 점점 브라자를 멀리했고, 그와 동시에 노브라 생활의 한 가지 단점을 알게 됐다.
가슴이 있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아무리 얇은 브라렛이라 해도 노브라와는 천지 차이라서, 브라자를 입지 않은 상태로 가슴을 꼿꼿하게 세우면 유두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고 만다는 것을. 나는 노브라로 집을 나서는 날이면 하루에 몇 번이고 남편에게 “보여? 보여?”라며 질문을 해댔고, 티가 안 난다는 남편의 체크를 받아야만 안심했다. 그러다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살짝 구부정하게 어깨를 모으거나 팔짱을 껴서 가슴을 가리곤 했다. 그 탓에 점점 내 어깨가 앞으로 말리기 시작하더니, 노브라 4년 만에 영락없는 라운드 숄더가 됐다. 브라자를 입어야 한다는 현실에 분노하는 만큼 내 젖꼭지에 떳떳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스포츠 브라에 휴지를 말아 넣고 탱탱한 와이어에 집착하던 과거의 내가 여전히 마음 깊숙한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모양이다. 올 여름엔 자세를 교정하겠다는 생각으로 어쩔 수 없이 브라렛을 받쳐입기 시작했는데, 그 탓에 기후 위기로 인한 폭염과 높은 습도를 온 가슴으로 경험하고 있다.
나는 브라자 덕분에 어깨를 빳빳하게 펴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지만 내 가슴 두 짝만큼은 전혀 당당하지 못했다. 결국 도톰한 맨투맨으로 가슴을 가릴 수 있는 겨울에만 찾아오는 해방이라면, 그것을 진짜 해방이라고 볼 수 있을까. 입어도 문제 안 입어도 문제인 브라자와의 끈질긴 인연에 대해 생각하면서, 오늘도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