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랑 엄마 (2)
사고 후, 엄마의 신체에는 하나의 진단명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들이 생겼다. 그중 하나가 목소리다. 엄마는 뇌를 다치면서 왼쪽 신체를 사용할 수 없는 편측 마비를 얻었는데, 이와 상관없이 목소리에 변형이 생겼다. 의식이 없을 때 유동식을 공급하려고 목에 냈던 구멍 때문이다. 가래가 끼고 사레에 잘 들리는 부작용은 덤이었다. 무엇보다도 대화할 때 의사전달이 어려워졌다. 갈라지는 목소리와 느린 말투 때문에 상대가 단박에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휠체어를 탄 엄마를 처음 봤을 땐 괜찮다가도 엄마가 입을 열었을 때 당황하는 사람도 있었다. 언어 장애가 있으면 인지 능력에 장애가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는 편견 때문이었다.
엄마가 대화에서 겉도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의 느리고 거친 말을 기다려 주지 않는 사람들이 싫었다. 그나마 일대일 대화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여럿이 함께하는 대화에서 엄마의 지분은 0에 가까웠다. 엄마가 얼마나 그 대화에 끼고 싶어 하는지 알기 때문에 더 속상했다. 매일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과 전화 연결이 됐을 때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연결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며 진행자가 전화를 끊어버린 적도 있었다. 의도적인 차별보다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차별에 나는 더 분노했다. 사람들 때문에 열을 받으면 나는 애꿎게도 엄마를 탓했다. ‘엄마가 발음을 잘했어야지.’ ‘그냥 나한테 전화 바꿔줘.’ ‘엄마, 조금만 천천히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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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셋이 첫 해외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목적지는 교토였는데, 부모님이 살고 있던 제주에서 직항으로 다녀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였다. 휠체어를 들고 떠나는 첫 해외 여행인 데다, 셋 다 일본에 대해 몰랐고, 현지에서 차를 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휠체어를 실을 수 있을 만큼 큰 밴을 가지고 있는 현지 가이드를 고용했다. 일본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넘은 엄마 또래의 한국인 여성이었다. 그는 세련된 솜씨로 2박 3일 여정 동안 우리를 교토 곳곳으로 안내했다.
엄마는 맛있는 일본 음식을 맛보는 것만큼 가이드와의 대화를 좋아했다. 다행히 가이드도 대화를 즐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대화 중에 가이드는 여러 차례 되물어야 했다.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죠?’ 그럼 나는 대화에 끼지도 않은 채로 엄마의 말뜻만 가이드에게 설명해 줬다. 여행 이튿날, 가이드가 참다못한 목소리로 다그치기 전까지 말이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게 그냥 두세요. 왜 자꾸 대신 말씀해 주세요?”
나는 무안했다가, 곧 화가 났다. ‘당신이 뭘 알아? 이런 엄마랑 20년 가까이 살아봤어?’ 하지만 이내 부끄러워졌다. 엄마는 가이드의 꾸지람에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기도, 나에게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상적인’ 대화에서 벗어나는 걸 견디지 못했던 건 엄마가 아니라 나였다는 사실을, 엄마의 얼굴을 보며 깨달았다. 어쩌면 엄마 대신 내가 말하는 동안 엄마의 마음이 정말로 작아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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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엄마를 새롭게 본다. 주눅드는 일 없이 계속 말하고 움직이는 엄마를 다시 본다. 내가 남편과 식당을 열었을 때 동네방네 전화를 걸어서 가게를 북새통으로 만들었던 사람.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휠체어를 타고 좁은 테이블 사이를 누비는 사람. 단골 식당 사장님에게 시장에서 생물 고등어를 사다 달라며 서슴없이 부탁하는 사람. 엄마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장애인으로서 맺는 새로운 관계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냈다. 엄마는 재활원에서 만난 이모와 점심 모임을 결성해 교통약자 콜택시를 타고 제주를 누빈다. 다친 이후에 처음 만난 간병사 춘자 이모와 20년 넘게 우정을 나눈다. 병원에 머물며 만든 인맥 덕분에, 간병사가 필요한 사람이 생기면 누구보다 빨리 지인을 소개해 준다. ‘당신이 나 구했으니 평생 책임지라’ 말했지만, 엄마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책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