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만 없는 병만랜드
“아, 오늘 남춘식당 쉬는 날이랜.”
영업시간을 확인하려 네이버 지도 앱에 식당 이름을 검색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휴무 소식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안돼. 올해 첫 콩국수는 꼭 여기서 먹고 싶었는데. 남춘식당은 나의 15년 단골 콩국수 집이다. 여름이 되면 걸쭉하고 뽀얀 그곳의 콩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국물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높은 밀도. 설탕이나 소금으로 간을 하지 않아도 완벽한 짭짤함. 콩물을 입에 넣을 때마다 체온이 0.1도씩 내려가는 듯한 맛이었다. 여기에 속이 꽉 찬 유부 김밥까지 곁들이면 완벽한 고탄수 고단백 식단이 완성됐다. 20대 내내 서울에 살면서 내로라하는 콩국수 맛집에 꽤 들락거렸지만, 아직 남춘식당을 이길만한 콩물 맛은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 엄마에게 남춘식당의 맛을 보여주기로 한 오늘이 식당의 쉬는 날이라니. 집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는 생각에 영업 정보를 미리 확인하지 않은 탓이었다. 이미 내 신체리듬은 오늘을 콩국수 먹는 날로 알고 있으니, 다른 메뉴는 성에 차지 않았다. 남춘식당을 대신할 강력한 대안이 필요했다. 그때 ‘제주 최고의 콩국수 맛집’이라며 얼마 전 추천받은 식당이 한 곳 떠올랐다. ‘이 집은 일 년에 딱 4개월, 여름에만 영업하거든.’ 이름을 듣고 고깃집 이름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검색창을 뒤졌다. 여기네, 통일가든. 고깃집 운영을 병행하다가 콩국수가 워낙 잘 팔리는 바람에 업종을 변경한 케이스인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 믿음이 갔다.
집에 가만히 있어도 팔오금에 땀이 고여 금세 끈적해지고 마는 여름이었다. 아침부터 에어컨을 켜면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을 쐬어야 할 것 같다는 노파심에, 온 집안 창문을 활짝 열고 선풍기 앞에 앉았다. 남편이 내려준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몇 시간 정도는 이렇게 더위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과 콩국수를 먹기로 한 건 점심이지만 어차피 아침 9시 40분이면 식당으로 출발해야 했다. 인터넷 여론에 따르면 통일가든은 영업 시작 시각에 맞춰가야만 긴 대기 줄을 피할 수 있는 맛집이었기 때문이다. 영업 시작은 10시 30분이었고, 조금 더 여유롭게 도착하기 위해 우리는 9시 40분에 만나기로 했다. 인간은 더위를 버틸 수 있어도 고양이들을 찜통 속에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결국 에어컨을 켜고 3시간 예약을 맞춘 후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는 부모님 댁 주차장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엄마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아빠는 땡볕 아래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아빠!” 내가 부르는 소리에도 아빠는 늘 그렇듯 고갯짓으로만 인사를 받았다. 엄마의 휠체어는 이미 차 트렁크에 실려있었다. “덥다. 타라.” 아빠는 담뱃불을 탁탁 털어 끄면서 말했다. 나와 남편이 약속 시간에 늦은 것도 아닌데, 차 안은 이미 시원한 에어컨 바람으로 꽉 차 있었다. 나는 차에 연결된 아빠의 휴대폰 내비게이션 앱에 ‘통일가든’을 검색한 후 경로를 설정했고, 이내 아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가 시내를 벗어나 큰 도로로 접어드는 동안 통일가든이 얼마나 유명한 맛집인지, 하지만 남춘식당에 갈 수 없어 얼마나 아쉬운지 나는 조잘거리며 떠들었다. 엄마와 아빠는 별 대꾸가 없었다. 무뚝뚝한 집안 분위기가 새삼 어색하게 느껴져서 나도 잡담을 그만두고 달리는 창밖을 바라봤다.
육지에는 비가 무지하게 내린다는데, 제주 하늘은 어제 잠깐 내린 장대비가 무색할 만큼 파랬다. 맑은 하늘 아래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시내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남춘식당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남의 잔칫집에 몰래 끼어 콩국수를 먹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이다 보니 부엌과 다를 바 없는 곳에서 수많은 아주머니가 국수를 말고 있었다. 원래는 거실이나 안방이었을 공간에 좌식 식탁이 쫙 깔려있었다. 그런데 최근 남춘식당이 잠깐 문을 닫더니, 완전히 재단장을 했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커다란 유리 통창을 달고 최신식 키오스크를 도입했다. 오래된 좌식 식탁이 사라진 자리에 깔끔한 입식 테이블이 생겼다. 주인이 바뀌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진하고 짭조름한 콩물 맛은 다행히 그대로였다. 하얗고 세련된 카페에서 콩국수를 먹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지만, 한 가지 좋은 점도 있었다. 드디어 이곳에 엄마를 데려올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였다. 비좁은 좌식 식당에는 휠체어가 들어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 여기 병만랜드 근처네.” 지도가 열려 있는 휴대폰 창을 힐끔 보고는 아빠가 말했다. 큰 도로를 벗어나 통일가든이 있는 조천리로 접어든 직후였다. “병맛랜드?” “아니, 병만랜드.” 무슨 테마파크 같은 곳이냐 물었더니, 예상보다 훨씬 더 자세한 엄마의 설명이 되돌아왔다. “김병만이 이번에 만들었댄. 목공도 할 수 있고, 펜션도 하고이. 카페도 있고이. 벽에 그림 그리는 걸로 유명한 개그맨이 와가지고 엄청 큰 벽화도 그렸다고 하던데.” “엄마랑 아빠는 어떵 영 잘 알아?” “이번에 유튜브 라이브 하는 거에서 봐신디. 밥 먹고 가보카?” 어딜 절대 먼저 가자는 법이 없는 법이 없는 아빠의 말이었다. 나는 냉큼 그러자고 답했다. 옆 좌석에 앉아 있는 남편을 보며 어떠냐고 물었더니, 떨떠름한 얼굴로 좋다고 답했다. 사실 이미 예상한 표정이었다. 유명인이 운영하는 카페는 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애써 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했다. 오늘만큼은 엄마 아빠 입맛에 맞는 코스를 짜고 싶었다.
내비게이션이 곧 목적지에 도착할 거라고 알렸다. 멀리서부터 식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만석일까 봐 불안했다. 조금이라도 덜 기다리고 싶어서, 나 먼저 차에서 내려 식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입구 근처에 빈 테이블이 있었다. “네 명이요.” 나는 안심하며 자리를 잡은 채 내 뒤로 들어온 사람들이 번호표를 받고 낙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엄마의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의자를 하나 빼서 구석으로 미리 옮겨뒀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입구 밖으로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휠체어를 탄 엄마와 휠체어를 미는 아빠가 따라왔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입구에 높은 계단이 연달아 3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엄마와 외출하기 전에 카페나 식당에 전화를 걸어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인지 미리 물어보고는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러기를 그만뒀다.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 어떤 휠체어를 사용하는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동행자가 있는지에 따라 ‘진입할 수 있는’의 수준이 천차만별인 데다, 수화기 너머로 휠체어 사용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사장님들이 난감해하는 걸 견디는 게 썩 기분 좋지 않았다. 이미 20년 넘게 엄마의 휠체어를 다뤄 온 베테랑 아빠만 있다면 웬만한 계단이나 턱은 오르지 못할 것 없기도 했다. 아빠는 능숙한 발짓으로 휠체어 뒷바퀴 옆에 있는 페달을 눌러 앞바퀴를 첫 계단에 걸쳤다. 나와 남편은 앞쪽 양옆에서 휠체어를 살짝 들어 올렸다. 합 좋은 우리 부부의 보조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몇 번 쿵쿵거리고 나서야 식당에 진입할 수 있었다.
파는 것은 콩국수와 열무국수뿐. 단출한 메뉴판을 보니 맛집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식당 벽에는 ‘직접 재배한 브로콜리잎으로 자가 제면하여 만듭니다’라는 문구가 큰 현수막에 적혀있었다. 아직 아침 11시도 안 됐는데 먼저 온 손님들에게 차례차례 서빙되는 음식을 보니 배가 고파왔다. 머지않아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도 콩국수 네 그릇이 놓였다. 검은콩으로 만든 국물 한가운데 동그랗게 말린 초록색 면이 섬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초록색과 검은색의 조합이 잘 어울려서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국물을 먼저 한 입 떠넣었다. 맛있었다. 내 입에는 남춘식당이 나았지만, 엄마는 여기가 더 좋다고 했다. “너네 엄마는 콩국수를 왜 이렇게 좋아하나 몰라.” 엄마는 아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다음에 오면 열무국수 먹어봐야겠다이.” 아직 콩국수 한 그릇도 다 먹지 못했는데, 벌써 다시 와서 다른 메뉴를 먹어볼 궁리를 하는 우리였다. 대화는 많지 않아도 식성은 꼭 닮은 것이 빼도박도 못하게 한 식구였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입구의 계단을 내려갈 차례였다. 올라올 때와 반대로, 휠체어를 뒤로 돌려 뒷바퀴부터 내려가야 했다. 경사진 곳을 정면으로 내려가면 엄마의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쿵쿵쿵 몇 번 만에 무사히 인도에 착지했다. 식당 양옆, 심지어 맞은편에도 간이 의자를 깔고 앉은 대기 손님이 한가득이었다. 우리는 인파를 피해 차도 갓길을 따라 휠체어를 몰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엄마가 차에 타는 것을 도운 후 나도 조수석에 앉았고, 남편은 엄마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실었다.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빠에게 물었다. “병만랜드에 병만이도 있나?” “하하하하하! 김병만이 니 친구냐? 완전 웃기네!” 배가 불러 기분이 좋은 아빠가 호쾌하게 웃었고, 모두가 따라 웃었다. 병만랜드는 아빠의 말대로 차로 7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었다. “김병만이 아프리카 어디 가서 부족장한테 받은 화살도 있고, 무슨 나무로 만든 조각상 같은 것도 다 갖다놨댄.” 그곳까지 가는 짧은 동안에 엄마와 아빠는 계속 병만랜드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가 ‘정글의 법칙’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덕분에 김병만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어, 엄마. 거기 김병만 자주 있나 봐. 만나면 사진 찍어줄게.” 엄마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답하지 않았다. 기대된다는 뜻이었다.
멀리서도 저곳이 병만랜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도로 쪽으로 난 건물 큰 벽면에 ‘병 만 랜 드’라고 적혀있었고, 그 아래로 스노클링 장비를 착용한 김병만이 거북이와 함께 바닷속을 헤엄치는 벽화가 있었다. 대학과 회사에 다니기 위해 서울에 살았던 10년 동안, 가끔 제주에 내려와 부모님 댁에 머물 때면 엄마는 종종 ‘정글의 법칙’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연예인들은 통나무로 집을 짓고, 라이터 없이 불을 지피고, 바다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비바람을 맞고도 살아남았다. 하나같이 아픈 엄마는 시도조차 못 할 모험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마치 자신이 큰 폭포, 넓은 바다, 깊은 우림을 직접 본 것처럼 감탄하곤 했다. 김병만은 엄마를 데리고 머나먼 아프리카로 떠나 낯선 세상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병만 랜드, 그러니까 그의 세상은 무엇이 다를까.
우리는 차에서 내려 조금은 기대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멀지 않은 곳에 포구가 있어 수평선이 한 눈에 들어왔다. 병만랜드는 서너 동의 큰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정확한 설명이 없어서 각각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하나의 큰 테마를 가진 공간이라기보다는, 아이가 있는 가족이 방문해서 체험활동을 하고 숙박도 할 수 있는 시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뒤편에는 캠핑장과 수영장이 있다고 들었지만 예약하지 않은 채 무작정 구경하기가 미안해서 우리는 그냥 카페로 향했다. 카페는 엘리베이터 없는 2층 건물이었으나 다행히 1층에도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카페로 가려면 넓은 잔디밭을 건너가야 했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카페의 입구까지 이어지게끔 넓적하게 깔린 돌이 길을 대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휠체어의 폭을 감당하기엔 돌길이 좁아서 끝없이 덜컥거렸다. 심지어 돌과 잔디밭 사이에 높이 차이가 있어 바퀴가 계속 턱에 걸렸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엄마의 어깨를 잡았다. “이왕 만들 거 좀 넓게, 평평하게 만들어주지.” 화가 난다기보다 이상하게 서운했다. 겨우 도착한 카페의 실내는 에어컨 바람 덕분에 시원했고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소금빵 몇 개와 커피를 주문했다. “2층 구경하고 올게.” 아빠는 1층을 다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나는 엄마와 함께 자리에 앉아 음료가 나오길 기다렸다. “엄마가 2층 못 가봐서 아쉽겠네.”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2층에 뭐가 있는지, 바다가 얼마나 가깝게 보이는지 유튜브 라이브로 이미 다 봤다고 했다. 방금 막 2층을 구경하고 내려온 사람처럼 나에게 그 풍경을 설명하는 엄마가 귀엽고 웃겼다. 그 사이 아빠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고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커피는 비싸고, 맛이 없었고, 양은 많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김병만이랑 사진이라도 찍어야지 싶어서 계속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명인이 운영하는 공간에 가서 사진을 찍고 싶어 안달한 것은 처음이었다. 김병만도 없다면 좋은 뷰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어야 했는데, 1층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덜커덕 거리며 지나온 잔디밭과 돌길뿐이었다.
“이제 가게.”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고 나오자 다시 뜨거운 햇볕이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멀리서 사람들이 돌길을 따라 하하호호 웃으며 카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 돌길로는 다시 못 가겐. 그냥 잔디밭 가로질러서 가자.” 나는 휠체어를 밀면서 방향을 틀어 잔디밭으로 들어갔다. 잔디는 폭신폭신했고, 휠체어 바퀴는 길 위에서 보다도 매끄럽게 굴렀다. 갓 심은 잔디라 그런지 우리가 지나온 길을 따라 바퀴 자국이 희미하게 남았다.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휠체어에 앉은 엄마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완전 병만 없는 병만랜드네. 병만이 대신 저 벽화 앞에서 사진이라도 찍잰?”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우리의 뒤를 따라 아빠와 남편도 잔디밭 위를 걸었다. 나는 하물며 김병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