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1현수막
22대 총선을 위한 유세가 한창일 때, 동네를 어슬렁 걷다가 얼토당토않는 현수막을 발견했다. ‘둘이서 사이좋게 투표하세요’라는 문구가 빨간 바탕 위에 적혀있을 뿐 다른 정보는 없었다. 불법 현수막으로 보이길래 평소처럼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해서 안전 신문고에 제출했는데, 다음날 신고 결과를 확인해 보니 현수막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상했다.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포털에 검색해 봤더니 여야당에서 남발하는 꼼수 유세 현수막이었다. 정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세 현수막 수량이 선거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일’, ‘하나’, ‘둘’, 빨간색과 파란색처럼 특정 후보를 연상하게 만드는 요소를 활용해 현수막을 추가로 만드는 편법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콧구멍이 커지기 시작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해서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었지만 선거일이 코앞이라 그런지 상담원과 빠르게 연결됐다. “길 가다가 불법 유세하는 현수막을 봤는데요. 철거 가능한가요?” 내가 묘사하는 현수막 내용을 듣더니, 상담원은 이런 항의를 받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담담한 말투로 답변을 늘어놨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선거철에는 투표를 권장하는 현수막을 걸 수 있습니다. 특정 후보나 정당을 지지하는 내용만 아니라면요. 그래서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철거할 수 없습니다.”
피 같은 세금으로 이뤄진 정당 보조금을 이런 쓰레기 같은 현수막을 내거는 데 사용하고 있다니. 말 그대로 선거철이 지나면 쓰레기가 되는 현수막 아닌가. 나는 뚜껑이 완전히 열려서 랩 하듯 질문을 쏟아냈다. “빨간색 바탕에 ‘둘이'서 사'이'좋게 투표하라는데, 특정 정당을 연상하게 만든다고 볼 수 없다고요?” “이 정도로 특정 정당을 연상하게 만든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그럼, 전 국민이 한 사람마다 하나씩 투표 권장 현수막을 달아서 전국에 현수막이 오천만 개 내걸려도 불법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꼭 그렇다고 할 순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내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1인 1현수막 운동을 벌일 사람처럼 들렸던 걸까. 상담원은 ‘꼭 그렇다 할 순 없다'며 재빠르게 발을 뺐다. 그래, 상담원은 죄가 없다. 자기 밥그릇 지킨다고 시민의 자유와 아픈 지구 따위 나 몰라라 하는 정신 나간 놈들이 문제지. 전화를 끊고 큰 소리로 욕을 뱉었다. “씨발 놈들!” 현수막 하나 때문에 진심으로 이민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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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수막과 관련된 모든 게 싫다. 아침에 집을 나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간판, 전광판, 입간판, 벽보. 이미 세상은 광고로 차고 넘친다. 그런데 이것도 모자라서 사람들은 나무와 전봇대에 현수막을 묶어 공중에도 광고 자리를 만들어 낸다. 피할 수 없는 길거리 위 광고 때문에 진절머리가 난다. 여성 혐오적 문구가 담긴 헬스장 광고, 투기를 조장하는 아파트 매물 홍보. 사람들은 유튜브를 보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광고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못하면서 주변에 널린 현수막은 배경처럼 자연스럽게 여긴다. 현실에도 광고 없이 산책할 수 있는 유료 플랜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누군가가 현수막 판 구독 서비스를 구현해 낸다면 한 달에 십만 원까지 지불할 의사가 있다.
축하할 일이 생기면 현수막부터 만드는 심리는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아서 축하의 마음이 들고 기쁘다면, 혼자 일기에 쓰거나 SNS에 올리면 될 일이지 왜 너도나도 현수막을 거는 걸까? 축하하는 척하면서 자신이 속한 단체를 좋은 일과 엮어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게 아닌가? ‘○○○의 딸 △△△양의 로스쿨 합격을 축하합니다!’ ‘□□□의 교장 승진을 축하합니다!’ 남의 개인사를 길 가다가 현수막으로 알게 되는 일 역시 인제 그만 겪고 싶다. 현수막은 보여주기와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뉴스피드와 같다. 제발, 앞으로 축하는 직접 찾아가서 손잡고 껴안으며 나누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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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됐다. 아침 9시가 되자마자 미리 알아둔 제주시청 도시재생과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불법 현수막과 관련해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공무원은 일반 시민이 할 수 있는 건 신고밖에 없다고 못 박았다. 불법이라 한들 개인의 사유물을 철거하면 재물손괴죄에 해당한다고 했다. 할 말을 잃은 나를 달래며 공무원이 말을 덧붙였다. “선생님, 근데 제주시에서 1년에 한 번 불법 현수막 수거 처리원을 모집합니다. 현수막 철거해서 가져오시면 돈도 드리고요. 작년엔 12월에 모집했는데 올해는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겠네요.” “돈 안 주셔도 되니까 그냥 제가 철거해서 가져다드리면 안 되나요?” “네, 그건 안 됩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전화를 끊은 것이 올해 4월이다. 그리고 이제 곧 12월이 된다. 수거 처리원 모집 공고를 놓치지 않도록 시청 웹사이트에 정기적으로 들어가 보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만약 7개월을 기다린 이번 시도까지 물거품이 된다면 합법적인 선에서 해결하는 수밖에. 다음 선거철을 공략해 전 국민 1인 1현수막 캠페인을 벌여 한반도를 현수막으로 덮어버리는 것.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국회의원들이 현수막 금지 법안을 긴급으로 발의하도록 만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 이런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제주시는 순순히 나를 불법 현수막 수거 처리원으로 선정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